베를린

독일에 온지 벌써 한 달 하고도 5일이 지났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참 정신없고 힘들었던 시간들이었다. 무엇보다도 말레이시아와 발리의 따뜻한 날씨에 적응해 있다가 0~10도 정도 되는 이곳 날씨에 적응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더구나 겨울옷은 한국에서 출국할때 입었던 옷 하나씩..애들 점퍼는 비행기 타면서 할머니 할아버지한테 주고 온 상황이라 옷이 문제였다.

발리에서 겨우 GAP 매장을 찾아 두꺼운 후드티와 청바지를 사고 말레이시아로 온 다음 공항에서 여러시간을 기다려 독일행 비행기에 올랐다.

아이가 셋에 비행기는 만석..막내는 이제 14개월이니 13시간의 비행을 잘 견뎌줄지 걱정이었다. 더구나 이미 3시간 비행에 공항에서 6시간정도를 보낸 뒤라…그리고 그 전에는 죽음같았던 발리 우붓-덴파사 구간의 운전도…

하지만 우리 아이들은 비행기에서 참 얌전했다..잠을 자거나 그런건 아니었지만 여튼 조용히.. 문제는 뒷열에 앉은 독일 아이였는데 호야정도 또래에 아주 13시간 내내 울고 소리지르고..

독일의 아이 교육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그 부모는 말 몇마디 하고 그냥 내버려두었다. 덕분에 주변의 모든 승객들이 어마어마한 피로를 느끼고 독일까지..

겨우 도착한 프랑크푸르트 공항..24년전 이곳을 통해 한국으로 떠나왔었다고 생각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베를린으로 가기 위해 프랑크푸르트 중앙역으로 가는 s반을 타려고 하는데 아무것도 모르겠다..겨우겨우 중앙역으로 와서 맥도날드에 짐을 풀고 심카드를 샀으나 인터넷 활성화가 안되어 일단 베를린에 가는 ICE 열차에 올랐다.

기차를 타고 또다시 베를린으로..발리 우붓에서 베를린까지 총 이동/대기시간을 합하면 약 40여시간..나와 정은이도 피곤하지만 아이들 상태도 정상이 아니다.

베를린 중앙역에 도착해서 airbnb로 예약한 숙소(5일간 임시로 묵을..그 이후는 다른 곳에 1달을 예약했다)로 갔다. 노이퀠른이라는 지역인데 이곳은 외국인들이 많아 동네 분위기가 많이 좋지 않다고 한다. 막상 도착해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더 안좋은 분위기..어찌어찌 거리 이름과 번지수를 보며 걸어가고 있는데 어디선가 ‘너 호철이 아니니?’ 하며 왠 아주머니가 불쑥 튀어나왔다.

어려서 독일에 있을 때 베를린에 놀러간 적이 있었다. 아빠가 공부하던 70-80년대 같이 공부하셨던 친구분이 계셔서 그곳에 놀러갔었는데 그 아주머니가 나와계신게 아닌가?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아 어안이 벙벙해 있었지만 너무 오래간만에 뵈어서 반갑기도 하고 놀라기도 하고..일단 인사를 드리고 이야기를 해 보니..아빠가 아주머니한테 우리가 베를린에 간다고 이야기 했고 아주머니가 숙소를 물어보니 내가 보내준 숙소 주소를 보내주셨던 것이다.

아줌마는 나랑 통화도 안된 상태에서 그냥 그 거리에 나오셔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셨던 것이다. 정말 헉 소리 나는 상황이었지만..일단 아주머니와 함께 숙소를 보는데 아주머니는 여기서 우리를 두고 갈 수 없으니 아주머니 댁으로 가자고 하신다. 결국 숙소는 취소하고 아주머니 댁으로…

아주머니는 엄마처럼 간호사로 독일에 오셔서 파란만장한 독일생활..베를린에서 40여년째 계신 분이다. 아저씨가 몇년전 돌아가시고 내 또래인 아이들도 독립해서 혼자 살고 계신데 아직도 일을 하시는…그것도 메르켈 총리한테 상까지 받으신 아주 유명하신 분이다.

아주머니 댁에서 정신없이 5일을 보냈다. 기본적인 생활정보를 아주머니가 다 알려주시고 차로 여기저기 데려다 주셔서 아주 편하게 지낼 수 있었다. 옷도 조금 샀지만 여전히 온가족이 거지꼴로..다음 숙소로 갔다.

3월 11일부터 4월 11일까지 예약한 숙소는 집주인이 아르헨티나로 여행가면서 내놓은 곳이다. Treptow 라는 곳인데 이곳에 terptow 공원이 바로 앞에 있고 주변에 마트도 많아 생활하기에는 좋은 곳이다.

그리고 지난 한달 동안 여러 일들이 있었지만 결국 이곳에 잘 정착하기 위해서는 취업을 우선으로 해야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급하게(?)이력서를 만들고 포트폴리오를 정리했다. 그리고 첫 두 회사에 이력서를 보낸 후 긴장이 풀렸는지 몸살 감기에 걸려 꼬박 일주일을 누워있었다. 

정신을 조금 차린 뒤 함부르크에 있는 회사 두 곳에 이력서를 보냈는데, 그 중 한곳에서 전화인터뷰 요청이 왔다. IT 쪽이라 모든 일들은 영어로 진행되지만 말하기에 영..자신이 없었던 나.. 그래도 돌이켜 생각해보면 2달간의 동남아 생활이 나의 영어 말하기 자신감을 어마어마하게 키워줬던것 같다. 

알수없는 자신감으로 전화인터뷰의 ‘영어’는 무리없이 진행했지만 인터뷰 내용은 너무 아쉬웠다. 회사 인터뷰라 당연히 팀단위 작업이나 협업에 대한 질문이 많았었는데 나는 혼자 일한지 3년정도 되었고 그 전에도 혼자 일하는게 익숙해서 너무 솔직하게 대답했던것 같다.

질문:팀단위 작업에 대해 어떤 경험이 있나요?

답변:저는 요즘 혼자 일해서요..

이런 분위기라고 해야 하나 ㅠㅠ

영어에 너무 긴장하느라 영어 대비만 했지 이런 전화 인터뷰에 나올 기본적인 내용은 전혀 숙지하지 못했다…그래도 뭐 지난 일이고 말은 최소한 통했으니 기다려 보는 수 밖에..

내가 이렇게 정신없이 지내는 동안 아이들은 추운날씨에 나가지도 못하고 집에만 박혀있었다. 날씨가 좋으면 조금씩 나가곤 했는데 내가 아프고 이력서, 포폴, 전화면접 준비하는 동안은 그냥 타블랫과 함께 내버려두었다.

정은이는 매일 음식하고 장보고 정리하느라 바쁘고..오랜 방랑 생활에 매일 시우를 업고 다녀서 그런지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다..

바깥활동을 별로 안좋아하는 호야도 맨날 자신의 한계를 넘어 걸어다니고 꼭 자야하는 낮잠도 안재우니 나가기만 하면 픽픽 쓰러져 자다가 이젠 짜증을 부리는데 온 가족이 이녀석 짜증 때문에 또 스트래스를 받는다.

결국 유모차를 하나 사서 시우도 아닌 호야를 태우고 다니기로 했다. 시우는 업고 호야는 유모차에… 유모차 산지 1주일이 되어가는데 너무너무 잘 샀다고 정은이랑 매일 기쁨의 눈물을 흘린다. 호야가 유모차에만 들어가면 쥐죽은듯 조용히 있고 거기서 자고 얌전히…ㅠㅠ

포트폴리오용으로 게임 두개를 만들고 한국 지인들한테 레퍼런스 레터 요청하고 이력서 보내고 각 회사 인사팀 사람들과 이메일로 부족한 자료를 보내고 하다보니 오늘이 되었다.

맨 처음 이력서 보낸 두 곳 중 한 곳은 내가 지원한 포지션과 맞지 않다며 바로 거부 메일이 왔고 다른 한 곳은 이력서가 많아 시간이 걸린다며 기다려 달라는 메일이 왔다.

두 번째 보낸 두 곳 중 한 곳은 전화 인터뷰 후 다음 절차를 진행할 수 있는지 여부를 대기중이고, 다른 한 곳은 희망연봉을 꼭 보내줘야 한다며 나한테 희망연봉을 달라는 메일을 오늘 보내온 상태이다.

세 번째로 보낸 곳이 있는데 여긴 회사가 좋아서 내 업무와 다른 부분임에도 혹시나..하고 보냈더니 역시나 거부 메일이 왔다.

그리고 엄마 친구분 아주머니 딸이 소개시켜준 회사로 이력서가 들어가 있는데 여긴 일단 기다려 보라는 회신 후 대기중이고 형의 지인을 통해 이력서를 넣은 회사에서는 정식으로 지원하라는 메일이 와서 지난 수요일에 정식으로 다른 서류를 접수시켰다.

전화 인터뷰를 본 회사를 제외하고는 서류전형에서 합격여부를 기다리는 상태이다.

그리고 그렇게 한달이 지났다. 이곳의 집주인과 협의해서 5월 12일까지 다시 한달을 연장한 상태인데..과연 그 전에 어떤 결과가 나올 수 있을까? 나온다고 하면 어떻게 다시 집을 구할지, 아무런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구직비자를 받아 계속 구직활동을 해야 할지.. 그런건 아직 모르겠다.

이력서를 준비하면서 한숨만 나오고 절망적인 생각만 하던 때도 있었지만 그 때마다 떠올린건 ‘난 지금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았으니 내가 시도할 수 있는 모든걸 시도해보자’ 라는 생각이었다.

구직활동도 미리 안될꺼야..이런 생각보다는 정말 밑져야 본전이니까 내가 여기저기 이력서 더 낸다고 한들 금전적으로 손해보는것도 아니니 할 수 있는 모든걸 해 본다음에 절망해도 늦지 않을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소소하게 이러저러한일도 많았는데 한 달동안의 일을 한 번에 정리하려니 너무 힘이든다.

다음주가 되면 전화인터뷰 결과도 알 수 있고 몇몇 회사의 서류전형에 대한 답도 올것이다. 나의 영원한 목표가 ‘취업’자체가 아닌 만큼 어떠한 결과도 수용할 수 있고, 또 어떠한 결과가 나오던지 나에게는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는 시작점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독일에서 취업을 포기해야 한다면..그 다음은 꼭 독일이어야 할까? 그런것만도 아니다. 처음에는 독일의 문화, 교육등이 부러워 독일로 왔다면 한국을 떠난지 100여일이 되는 지금의 생각은 ‘글로벌’하게 살 수 있다면 좋다는 쪽으로 생각이 바뀌었다.

다른 나라에도 기회가 있겠지..나를 원하는 곳이.. 이렇게 생각하면서 조금 더 방황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하지만 여기서 기회를 만들고 그 기회를 잡고 싶다. 내 마음대로 되는건 아니겠지만 왠지 그렇게 할 수 있을것 같다. 미리 김칫국부터 마시는건지도 모르겠지만 결국 될건 되고 안될건 안되는거 아니겠어? 

8 Responses

  1. 항상 마음으로 응원합니다. 초기라 힘드신점이 셀수없이 많으실텐데 부디 성공적인 정착하셔서 이민을 꿈꾸는 저희같은 사람들에게 큰 용기를 주시면 좋겠습니다.

  2. 전에도 댓글 남긴적이 있습니다만… 비슷한 길을 가려고 하는 사람으로써 사노이님이 가신 흔적을 보고 많은 생각을 하며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한국에서 일하는 IT 인중 한사람으로, 사노이님의 과감한 결단과 행동이 정말 부럽기만 하네요. 저는 언제쯤 그곳에 갈수 있을지… ㅎㅎ

  3. 새로운 글이 올라와서 얼마나 반갑던지요…
    그래도 고군분투하시는 모습에 감동과 용기를 보여주시네요
    아이들 셋과 더불어 애쓰시는 아이들 엄마께도 힘내시라고 전해주시구요
    건강하세요^^

  4. 힘내세요!!!! 꼭 독일이 아니여도..괜찮을듯해요.세아이들이 아빠엄마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게될 날이 올꺼예요! 성공을 응원할께요. 성공이란…가족과 행복하게 지내는것..아닐까요 🙂

  5. 올려주시 글을 각각 3번이상은 읽고 또 찾아와 읽고 있습니다. 제 다음달부터의 생활이 이 글 그대로라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워지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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