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91년에 있었던 곳. 도르트문트 대학
왼쪽에 살짝 보이는 주황생 건물이..맨..이름이 맨 뭐였는데 맨자(MENSA)였던가?
암튼 학생식당이었는데 종종 가서 먹었다.. 텁텁한 폼매스(감자튀김)가 생각나네..
아래로는 은행하고 지하철 역이었던 걸로 기억..
오른쪽 하다느이 모노레일같은건 하-반(H-Bhan)으로 거꾸로 달려서 가는 기차같은거..
승차권 1마르크였던걸로 기억..
사진은 플리커에서 막 퍼옴.. 언제 다시 가 볼 수 있을까..
도전과성취
90년-91년에 있었던 곳. 도르트문트 대학
왼쪽에 살짝 보이는 주황생 건물이..맨..이름이 맨 뭐였는데 맨자(MENSA)였던가?
암튼 학생식당이었는데 종종 가서 먹었다.. 텁텁한 폼매스(감자튀김)가 생각나네..
아래로는 은행하고 지하철 역이었던 걸로 기억..
오른쪽 하다느이 모노레일같은건 하-반(H-Bhan)으로 거꾸로 달려서 가는 기차같은거..
승차권 1마르크였던걸로 기억..
사진은 플리커에서 막 퍼옴.. 언제 다시 가 볼 수 있을까..
게스테 하우스는 영어로 게스트 하우스.
즉 손님의 집–; 이라는 뜻이다.
내가 1년간 살았던 그곳은 도르트 문트 대학의 게스테하우스 였다.
바로퍼 스트라쎄..
가장 신기했던건 집 열쇠가 현관문에 대응한다는것..
집 뒤로는 엄청나게 넓은 대학 캠퍼스가 펼쳐져 있고
집 앞으로는 수백년된 집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창밖으로 보면 끝없는 도시에 멀리 화력발전소인지의 굴뚝만이
바라보였다.
게스테 하우스의 지하에는 비발디라는 식당이 있었는데
참으로 맛이 없었던 기억이 난다–;
게스테 하우스는 5층인가 6층인가로 되어있는데
게스테 하우스의 꼭대기에는 그곳의 사람들이 각종 파티,세미나를
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고 바로 옆에 아이들을 위한 놀이방
비슷한 공간이 있었다.
이곳에는 많은 추억이 있어서 무엇부터 끄집어 내야 할지 모르겠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건 포근한 방안의 공기이다.
카펫이 깔려있어서 그런건지도 모르지만 집에 들어가면 언제나
포근한 냄새가 풍겨왔다.
그 건물 안에서는 3번인가 이사를 했는데 가장 넓은 방에서 부터
가장 좁은 다락에 이르기까지 .. 정말 재미있었다.
가장 넓은 방은 5B호실이었는데 부엌과 거실 방이 따로 있었던것
같다.
아빠랑 형이랑 거실에서 귤던지고 놀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가장 좁았던 6층에서는 지붕 아래 집이라 욕조에서 일어서면
머리가 부딛히고 온 가족이 한 침대에서 잠을 자야 했다.
나중에 미국에서 온 친구도 만나고 독일 친구들도 데려오고 했지만
처음 6개월은 형과 둘이서..때론 혼자서 추억을 만들어야 했었다..
독일에서 택시를 탄건 시청(?)에 뭔가 등록하러 갈 때였다.
관공서 쯤으로 해두자.
아직 독일에 전혀 적응이 안된 상태..
독일은 택시비가 무척 비싸다.
택시는 전부 밴츠!(가끔 아우디나 폭스바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터기가 기계식이라 좀 놀랐었다.
(한국은 언제나 말달리는 초록색 매터기..)
지금 생각해보면 외국인 등록 정도 되는 절차였던거 같은데
엄마가 형이랑 나한테 그곳에서 뭔가를 묻거들랑 꼭
대답하라고 했던 말이 15년이 지난 지금도 생각난다..
Woher kommst du?
라고 물으면..
Ich bin aus Korea gekommen!
이라고 ㅠㅠ
하지만 예상과 달리 그곳에선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아주 인상깊었던건 그 관공서에서 일하는 직원이 난장이 였던것.
더 놀랐던건 그 난장이 아저씨의 헤어스타일이 옆머리는 모두
밀어버리고 가운대 머리만 새워서 녹색으로 염색한 스타일
이었다는 것이다.
아저씨와 악수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시청에서 기다리는 동안 독일 환타를 자판기에서 뽑아 먹었는데
너무 맛이 없었고, 나오는 길에는 하리보 콜라맛을 사먹으면서
나왔다!
이렇게 무사히 독일에 등록(?)을 한 11살 꼬맹이..
엄마친구의 독일인 남편 골프광..
그당시엔 ‘아..역시 독일이 잘 살아서 워낙 골프를 많이 치니
별명으로 골프광이라고 부르는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알고보니 이름이 볼프강(Wolfgang)이었던것이다–;
볼프강 아저씨의 가족은 모두 4명.
아저씨,아줌마(엄마와 친구),야스민과 나타샤 두 딸이 있었다.
야스민은 나와 형의 중간나이. 즉 나보다 한살 많았고
나타샤는 한참 어렸는데 당시로 5-6살인가 그랬다.
(당시 본인 11살–; 나타샤도 이젠 벌써 20대인가? ㅠㅠ)
볼프강 아저씨의 취미는 RC비행기 만들고 날리기.
가끔 아저씨와 아저씨 차를 타고(피아트 였던가..) RC전용 비행장
에 가서 비행기 날리는걸 구경하곤 했다.
아저씨 집의 지하실엔 아저씨의 작업실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나무를 깍아 직접 비행기를 만들곤 했다.
야스민과 아저씨가 친구처럼 허물없이 이야기 하고 장난도 치는걸 보면서
참 다정하다고 생각했다. 우리집도 허물없이 지내는 편이지만
야스민과 아저씨만큼은 아니었으니까..
야스민은 나이가 있어 우리랑 어울리는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우리도 마찬가지..더구나 남자여자 편가르던 한국 국민학교에서
바로 독일로 온터라 여자들과는 친하고 싶지 않았다.–;
나탸샤는 어려서 그런지 아주 귀여웠는데 금발이었던걸로 기억
(야스민은 갈색?) 집에 어딘가에 사진이 있을건데 나중에
한번 찾아봐야 겠다.
경양국민학교 4학년 6반 반장!
1990년 내 나이 11살.
‘독일에 가서 좀 있다가 올까..’
가끔 밥먹을 때 아빠가 하던 이야기는 이로서 2년째다.
예전에도 친구들한테 잔뜩 자랑했다가 무산된 적이 있어서
별로 믿고 있지는 않았다.
그냥 언젠간 갈 수 있을까? 라는 생각 뿐.
1990년 10월 3일 동서로 분리되어있던 독일이 극적으로 통일되었다.
그와 함께 아빠의 결심도 굳어진것 같았다.
지역개발을 전공하는 아빠로서는 분단국가였던 우리나라와 독일.
특히 통일 이후의 독일을 연구하는건 대단히 중요한 일이었을 것이다.
우리 가족은 그 길로 4학년 겨울 방학을 1주일도 남겨놓지 않고
독일로 갔다.
서울로 가는 전날. 학교를 나오는 나를 친구들이 교문까지 배웅해
주었다. 물론 남자들만!
당시의 국민학생들은 남자 여자 편가르고 싸운는 일이 많아서
오직 남자애들만 배웅을 나왔던것.
그렇게 교문에서 빠이빠이를 하고 흥분된 마음을 안고 집으로
왔다.
2주정도 전부터는 엄마한테 독일어를 배웠었다.
유일하게 할수있는건 알파벳을 쓰는것과 읽는 법 정도였다.
다행히 독일어는 읽기가 아주 쉬워서 뭔가 되어간다는
느낌이 들 정도 였다.
형과 나의 짐속엔 당시 유행했던 용소야 만화책도 들어있었다.
권법소년 용소야에서 좀 발전한 축구 소년 용소야..
김포로 가는 광주공항에서 대낮에 형이랑 아주 큰 유성을
본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태어나고 3개월정도 있다 비행기는 타봤다지만 전혀 기억에 없고,
떨리는 맘으로 김포행 비행기를 탔으나 비행시간이 짧고 너무
흥분해서 마치 놀이기구를 탄 듯 김포에 도착했다.
그렇게 서울 호텔에서 하루를 보냈다. 엄마아빠가 뭔가 하러갔었나..
나와 형은 호텔 복도에 쪼그리고 앉아 용소야 만화책을 봤다.
다음날 독일로 가는 대한항공 비행기에 올랐다.
국내선과 비교도 안되는 점보기.
창밖으로 펼쳐지는 어마어마한 풍경에 넋을 잃었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을까..
독일 프랑크 프르트 공항에 도착했다.
그때부턴 아주 정신이 없었다.
아빠 후배라는 분과 엄마 친구 남편이 우리를 마중 나왔는데
우리가 갈곳은 프랑크 프르트에서 2시간(기억잘 안남) 정도
차를 타고 가야 하는 도르트문트라는 곳이었다.
축구 팬이라면 이 마크를 기억할것이다.
도르트 문트를 연고로 하는 축구팀~!
암튼 당시 듣기로 “골프광” 이라는 사람과 아빠 후배라는 사람의
BMW를 타고 도르트문트의 아빠 후배 집으로 향하였다.
아우토반의 엄청난 속도와 우리가 타고있는 BMW의 엄청난 속도에
놀라면서..
독일과 나는 특별한 인연을 가지고 있다.
엄마 아빠가 결혼한 곳.
내가 태어난 곳이 독일.
그리고 나의 12살을 보낸 곳.
어찌보면 짧은 시간이지만 아직도 내 어린시절의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있는게 독일 생활이다.
나이가 들어 다 까먹기 전에 기억나는대로 적어볼 생각이다.
돌이켜 보면 벌써 15년이나 지났는데 우리나라는 그 당시의
독일 문화 수준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우리 나라도 나름대로 색이 있어 1:1로 비교할 수 는 없겠지만
조금 아쉬운 기분이 드는건 왜일까.
생각나는대로 조금씩이라도 내 기억을 기록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