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푹푹 찌는 여름, 거실로 나와 눕는다.

우웅 하는 냉장고 소리와 기계식 타이머로 맞춰놓은 선풍기의 타이머 돌아가는 소리,
그리고 삐걱거리며 회전하는 선풍기 머리와 취침 기능으로 간간히 돌아가는 모터소리와 그 바람..

그 해 산 비디오는 몇 번의 정전으로 12:00 이라는 숫자만 끝도 없이 깜빡이던, 그 푹푹 찌던 여름..
어느 집에나 깔려있음직한 대나무 돛자리 위에 얇은 요 하나 깔고 누워서 이런 저런 소리, 이런 저런 불빛에 또 이런 저런 생각하다 보면
어느 사이 잠들어 아침이 되어있곤 했다.

때로는 꺼낸적 없는 얇은 이불에 덮여, 때로는 내 방으로 옮겨져 일어난 아침은, 언제나 네모낳고 하얀 천장에 저녁과 다른 선선함이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또 다시 거실에 누워 머리를 베란다에 두고 하늘을 보면, 끝도 없이 흐르는 구름 밑에 갈치 파는 리어카 아줌마의 녹음 소리가 동네 가득히 퍼진다.

가족들은 바빴지만 마음은 어느 때 보다 느렸고, 걱정은 많았지만 그 보다 더 많이 웃었다.

시간은 흐르고 흐르고 또 흐르고 그 때 거실에 누워 뒹굴거리던 시간처럼 이제는 흐르는 시간에 떠밀려 구르고 구르고 또 구른다.

30년 전의 나는 내 아이만큼 작았지만, 나는 오늘의 나처럼 생각했다.
그리고 오늘 똑같은 냉장고 소리가 나를 30년 전으로 데리고 간다.

나와 마주한 나는 무엇이 변했는지 정말 알수가 없다.
그 때의 아빠도, 엄마도, 나도 그냥 하루 더 자고 일어난 것처럼 그대로, 조금 크고 조금은 더 나이가 들어 있을 뿐이다.

도마

자취할때 엄마한테 강탈해온 동그란 나무 도마.

결혼할때 자연스럽게 나의 재산으로 취합되어 잘 지내왔으나..
무리한 건조 덕분인지 둘로 쩍..갈라지고 말았다.

그 도마를 보던 우리 엄마..같은 도마를 하나 더 가져다 주셨다.

동그란 도마.

우리집에 몇 개가 있는지모르겠지만 내가 기억하기론 이 두 개가 전부다.

엄마아빠가 독일에서 가져온 도마..내가 어렸을때 부터 있었던 도마다..
그럼 벌써 도마의 나이가 30살이 넘었단 말일까?

어렸을땐 주로 빵을 써는 용도로 사용했던것 같은데..

지금은 내 앞에서 맥주 안주를 자른 접시로 사용되고 있다..
물론 나와 정은이의 소중한 도마이기도 하다..

도마라는 단어의 개념을 이 도마를 통해 배워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사각형의 도마는 어색하다.
나무가 아닌 도마도 어색하다.

엄마가 가져다 주신 이 도마도 가운대가 볼록한게 금방이라도 부러질것 같다..
내가 본 도마중에 동그란 도마는 이것 밖에 없었는데..

소중히 아껴써야겠다.


Eine kleine nachtmusik

7살 8살때쯤인가..
주로 일요일 아침이었던 것 같다.

평소보다 늦잠을 자고 일어나면 엄마랑 아빠랑 부엌에서 토스트를 먹으면서
즐겁게 이야기 하고 계신다.

고소한 커피향을 맡으며 햇볕이 잘 들어오는 거실 바닥에 휙 눕는다.
먼지는 나지만 푹신한 카페트의 까칠하면서 부드러운 느낌이 너무 좋다.

누워서 이리저리 둘러보면 오디오 아래 LP판들이 눈에 들어오고..
제목은 몰랐지만 내가 듣고 싶었던 노래..그리고 내가 틀면 엄마아빠가 좋아했던 노래를 찾는다.

수많은 LP판 속에 이거던가…저거던가..뒤적거리다..
확신은 안서지만 하나를 골라들고 작은 손으로 세팅을 한다.

정말 신기하게도 항상 틀리는 법 없이 흘러나오는 그 노래는
Eine kleine nachtmusik ..

그땐 제목도 몰랐던 저 노래를 듣고 또 듣고..
나름대로 분위기 잡는다고 틀어놓고..그리고 웃으면서 엄마아빠를 바라본다.

웃음이 가득했던 20년전 우리집이야기.

12월의 기억

딱히 기억해야 한다면..
언제나 12월은 바빴던거 같다..

특히 최근 몇년은..

2003년에 새로운 시스템을 혼자 개발하게 되면서 1월 10일까지 엄청 힘들었다.
2억짜리 프로젝트였는데 성공시키고 정말 혼자 울었다..
정말 눈오는데 새벽에 출동하고 아주 슈퍼맨이었지..

2004년에는 회사를 옮기면서 아주 고생을 제대로 했고..
(목요일 퇴사 금요일 출근–;)

2005년에는 이맘때쯤인가..온갖 이벤트, 게임개발, 플래시강좌로 정말 눈코뜰새없었다..

올해는 좀 괜찮을줄 알았더니..각종 과제, 텀, 시험으로..크흑..
그래도 오늘은 블로깅할 여유가 있으니 다행..

다가올 1주일이 살짝 두렵다..

내년 12월에는 무엇을 하고있을까..
오늘 처럼..그냥 예전 생각하며 피식 웃을 수 있는 여유가 있다면 좋겠다.

수능의 추억

내가 수능을 봤던 때가 98년이니 근 10년이 다 되어간다.
난 수능시험이야 그냥 시험처럼봤는데..
두려움 보다는 너무나 홀가분 했던 기억이 난다.

끝나고 나오면서..이제 진짜 끝이다..라는 생각과..
운전면허따야지..이런 생각을 했는데.

사실 내 수능의 에피소드는 두가지 이다.

하나는 시험 중..
평소 수학에 자신이 있었던 터라..30분만에 수리영역을 다 풀어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풀어보는데..14문제를 다시 풀어서 9문제를 고쳤다–;
나중에 보니 그게 다 맞았던데 참으로 운명의 갈림길이아니었을런지..

더구나 너무 못했던 확률문제 하나는 시험지에 모든 경우의수를 나열해서 풀어버렸다.
(아이러니하게 이제서야 확률과 통계로 골머리를..ㅠㅜ)

그리고 하이라이트는 채점..
그당시만해도 인터넷이 보급되기 바로 직전이어서 보통 애들한테 정답확인은
TV EBS채널에서 진행하는 채점 방송을 보는 것이 유일했다.

하지만 앞서가던 나…천리안의 정답공개 페이지에 들어가서 초 스피드로 채점을 하기 시작했다.
소심한 나는 수험표에 모든 답을 다 적어왔다–;

언어영역 채점 시작..
옆에서 엄마가 상기된 표정으로 보고계신다.
1번 찍(틀리는 소리) 2번 찍 3번 찍….
아..내가 언어를 못한다지만 이정도는 아닌데..

120점 만점에 60점 정도를 맞았다..(평소 110점이상)
엄마는 힘없이 부엌으로 가버리고..난 재수를 결심했다..
죽어도 재수는 안할려고 했는데..

그러던 바로 그 순간..컴퓨터 화면에 보이는 자그마한 글씨..’짝수형’..
아..난 홀수형인데 썅!
바로 엄마를 다시 호출하고..채점에 돌입–;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채점을 끝냈다..머 만족할만한 수준으로..

엄마도 십년감수했다며 빨리 수리영역을 채점 해보란다..
수리영역은 일단 홀수형 확인.
그리고 채점을 하는데…엥…내가 두번이나 풀고 검산했는데 쭉쭉틀린다..
셤 볼때도 수학 망쳤다고 울상인 친구들이 많았는데..
나도 너무 많이 틀린다..

엄마 표정은 다시 굳어지고..다시 부엌으로 가버리신다..
혹시 아까처럼 짝수형은 아닌가 확인했지만..그렇지 않았다..
떡하니 홀수형이라고 쓰여있는 글씨..
눈물이 앞을 가렸다..

한숨을 푹..쉬던중..쉬웠던 주관식 문제가 틀려있는것을 발견 다시 면밀히 검사해보니..

‘인문계 홀수형’

아…난 빌어먹을 자연계인데;;;
다시 채점을 해보니 역시 ㅠㅠ

이제 엄마는 못보시겠단다..홀로 채점을 끝내니..고1때와 비슷한 점수가 나왔다–;
그때 가슴 졸였던걸 생각하면 정말…그게 벌써 8년 전이구나..

새벽

요 며칠 새벽 3시 이후에 깨어있는 기간이 많아졌다.

새벽의 분위기를 느끼다 보니..예전의 추억들이 많이 떠올랐다.
고등학교때는 주로 시험공부를 한답시고 책상에 앉아있던 추억..

일초일초 흘러가는 시간을 보면서 남은 시간에 따라 다시 계획을
짜곤 했었다..(결국 계획만 짜던적이 수두룩)

대학교 기숙사에서는 밤새 이야기 하고 술마시던 때가 많았고..

오늘 생각나는 날은 99년..대학교 1학년 겨울방학때 잠시 자취를 할 때였다.
기숙사는 방학때 문을 닫았고.. 계절학기와 아르바이트를 위해 집에 내려가지 않고
약2달간 자취를 해보기로 결심했다.

혼자살아보고 싶었던 그 때..집을 구하고 이사를 하고 길쭉한 방에
혼자 누워있으면 한편으로는 두근거리면서도 한편으로는 외로웠었다.

종종 새벽까지 게임도 했었는데, 저녁으로 먹었던 컵라면이 모니터 옆에 보일때면
절로 한숨이 나오곤 했었다.

꿈을 잃어버렸던 그 때..처음 세상에 나와 외로웠었던 그 날들이 생각난다.

17년 뒤

1989년의 스승의 날이었던걸로 기억난다.
반장들 엄마가 학교에 와서 선생님 대신 한시간씩 맡아서 수업을 해주기로 하셨는데,
난 3학년때 2학기 반장이었고 1학기엔 반장이 아니었다.

무슨 이유였는지 나는 아직도 모르지만 몇몇 아줌마들의 아줌마틱한 별로 도움안되는
시간이 지나고 갑자기 엄마가 교실에 들어왔다.

‘난 반장도 아닌데..’라는 생각과 친구들이 이상하게 생각할까봐 얼굴을 붉혔다.
엄마가 왜 저기에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고, 그 이유에 대한 타당한 해답도 찾지 못했지만
엄마의 한시간 수업은 시작되었다.

그 한시간 동안 기억나는건 엄마의 가지런한 이가 보이는 환한 웃음과, 엄마의 말 한마디였다.
다른 사람으로부터도 자주 들었던 말이지만,

“여러분의 10년 뒤에 무엇이 되어 있을까요?”

라는 질문이었다.

막연히 대통령,사장 이런식의 장래희망을 적고, 그날 그날의 기분에 따라 슈퍼맨도 되고
배트맨도 되고 큰 트럭의 운전수가 되는 꿈도 꾸던 그 시절 나에게 10년은 아주아주 크고
긴 시간이었고 머리속으로 상상하는것이 우스울정도의 거리감이 있었다.

그로부터 약 17년이 흐른 지금..나는 게임을 만들게 되었다. 누가 시킨것도 아니고
어쩌다가 이렇게 된것도 아닌 내가 선택한 방향으로..내가 원하는 길로..

오늘로 부터 10년 뒤의 나는 상상할 수 있을까..

그때는 이런 직업이 있는 줄도, 이렇게 될거라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렇게 긴 시간도 1년 1년..한달 한달..하루..하루..한시간씩이 모여 지나간것이다.

페이첵이란 영화에서 미래를 보는 기계를 만든 주인공이 ‘어떤 사람의 미래를 알게 되면
그 사람에게 그 순간부터 미래는 없어진다.’ 라고 했다.

사실 미래는 볼 수 없고 나한테도 미래는 없다. 과거는 내 머리속에, 그리고 현실의 ‘나’로
분명히 존재한다.

현실을 살자..지금을 느끼자..이 시간 이 기분 이 감정들 나한테는 너무 소중하고 모두
잊기 싫은 대단한 경험들이다. 지금과 나.

수궁갈비

광주 체육관 옆에 있었던 수궁갈비.

그곳에 가면 맛있는 갈비도 있었지만
형과 나를 사로잡는 멋진 조립식 모형과 각종 새들이 있었다.
특히나 말을 잘하는 구관조는 손님들한테 큰 인기였는데
당시(18여년전)로선 대단한 서비스라 언제나 만원이었다.

고기도 맛있어서 우리집에서 행사가 있으면
무등산 신양파크호텔 뷔페나 수궁갈비에 가서 꼭 밥을 먹곤했다.

한번 먹으면 3일을 고기 트림을 했던 그때..
아마도 고기를 잘 소화시키지 못해서 였을것이다..

지금..새벽 4시..수궁갈비에서 갈비가 먹고싶다..
아직도 있을까?

1988년의 기억.

1989년 나는 10살이었다.

10살이면 국민학교 3학년.

금성 286..
CGA칼라
2400bps모뎀
램1메가에 40메가 하드까지 달린 초 고급 사양..

컴퓨터 학원에 다닐때는 XT만 썼지만 우리집에 컴퓨터가
생기는 날..난 너무 기뻐서 매일 뛰어서 집에 들어왔었다.

내가 왜 컴퓨터를 좋아하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냥 좋아했던것 같다.

생각해 보면 내 인생에서 이렇게 오래 만져온 물건이 있을까..

그때도 지금처럼 깜깜한 상태에서 컴퓨터를 하곤 했다.

내가 컴퓨터를 할 수 있는 시간은 하루 1시간으로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엄마아빠가 수영장에 가는 동안
몰래 컴퓨터를 했어야 했다.

286-386-486 컴퓨터를 모두 보유했었던 우리집.

허큘리스 카드부터 CGA EGA VGA 를 모두 경험해보았다.
램이 4메가에 20여만원 할때 조립식 피시도 사 보았고
386에서 3D스튜디오를 돌리기 위해 우리집 컴터에 코프로세서가
있는지 확인도 해 보았다.

내가 첨으로 컴터를 뜯어본게 386쓰던 시절이니..

터보씨 공부도 했다. 게임을 만들고 싶어서..
몇일 하지 않았지만..

데이콤에 들어가서 전국에 접속자가 몇십명 되지도 않았는데
아저씨들하고 채팅도 해보고 게임도 해봤다.

인디아나 존스 게임을 하면서 turn on / turn off의 의미를
엄마한테 물어보던 일도 생생히 기억한다.

닥터 할로(맞나)로 그림을 그리고 장원으로 친구들한테 생일
초대장을 만들어서 24핀 도트 프린터로 찍어 돌렸다.

친구들끼리 무슨 파를 조직한다고 내가 회원증을 만들어서
코팅하러 갔다가 종이가 얇아서 문방구 아줌마가 다 망쳐놓은
기억도 난다.

아빠가 서울이라도 다녀오면 뭔가 재밌는 게임을 가져왔는데
그게 슈퍼맨하고 인디아나 존스였다.

인디아나 존스는 마이컴이라는 잡지를 보면서 엔딩을 보았다.

3학년때인가.. 아빠 연구실에서 매킨토시를 처음 보았는데
마우스,사운드카드,불꽃놀이 스크린세이버를 보고 완전히 충격에
빠졌었다.

아래아한글, 지금의 v3인 v1,v2등도 그 즈음 보았던것 같다.

독일에 가기 얼마전쯤에 마우스가 나왔던거 같다.

독일에 가서는 집에 컴퓨터가 없었기 때문에 걸어서 십여분 걸리는
아빠 연구실까지 가서 오락도 하고 컴퓨터도 하고 그랬다.

독일 도스….독일에서 아빠를 졸라서 산 정품게임은 다름아닌
심시티. 예전부터 해왔던 심시티 이지만 칼라로 꼭 즐기고 싶었다.

아직도 그 박스가 아마 있을거다..

독일애들은 당시 생일 파티를 하면 파티 업체에서 아예 컴퓨터를
오락용으로 빌려주곤 했다. 거기서 래밍즈를 했던 기억이 난다.

6학년 쯤에는 학교에도 컴퓨터를 가지고 있는 애들이 몇몇 있어서
게임을 공유하기 시작했다. 플로피 40여장짜리 게임도 나오고
3.5인치 디스크드라이브가 보급되기 시작했다.

데이콤이 천리안으로 바뀌면서 조금씩 정보를 많이 얻을 수 있었다.

도스 6.0도 나오고 윈도우 3.1도 쓰고..

6학년에서 중1에 걸쳐..

옥소리라는 브랜드로 시디롬이라는게 나오고 애드립 사운드
카드가 보급되기 시작했다.

애드립 사운드 카드로 했던 게임들은 정말 잊을 수 없는 소리를
들려줬다.

내가 물려받게 된 386컴퓨터에 30여만원이나 하는 옥소리 사운드
카드와 2배속 시디롬을 장착했다.

트레이가 열리고 닫히는 것만 봐도 너무 신기했다.

옥소리에서 지원하는 작곡프로그램으로 노래도 만들어 보고
조이스틱도 사서 게임도 했다.

중학교때는 본격적으로 천리안과 하이텔에 빠져들었었다.
중학교 친구중엔 하이텔에 게임을 올리다가 동서게임채널에
고발당한 녀석도 있었다.

중학교때면 1993년정도인데..그 즈음에 게임과 채팅을 많이했다.
사설 비비에스도 유행하던 시절인데 천리안 장터에서 14만원을
주고 14400BPS모뎀을 사서 집에다가 사설비비에스를 구축했다.
당시엔 9600모뎀이 대세였다.

호롱불..

지금으로 보면 웹서버를 돌린건데..참으로 무모했었다.
학교에 가면 자료가 많은 사설비비 전화번호를 교환했고
모뎀 초기화 명령어 등도 줄줄 외우고 있었다.

이즈음 아빠가 집에 ISDN전화기를 설치해서 우리집은
모뎀과 유선전화를 동시에 쓸 수 있었다.

발신자 번호 표시까지 되어서 모두들 놀랐었지..

이즈음 나우누리와 유니텔이 생기면서 PC통신 시장이 많이
커지기 시작했다.

EA가 생겨났고 피파랑 NBA게임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천리안 PPP서비스를 통해 인터넷이란곳에 처음 접속해보기도 했다.

뭔지도 모르면서 오토캐드도 깔아보고 또다른 여러 3D프로그램을
깔아서 “오브젝트” “월드” 이런 개념들을 물어보고 다녔다.

나는 뉴스에서도 극소수를 지칭하는 세대였다.

우리들이 정모(정기모임), 정팅(정기채팅), 번개의 개념을 만들었다.
최초의 온라인 장터 거래도 역사에 남을 수많은 프로그램도
모두 눈앞에서 보아왔다.

여자친구를 위해 만들었다는 MDIR…
컴퓨터와 채팅하는 프로그램
한글로 프로그램을 짤 수 있는 …이름까먹었다..풀 비슷한머였는데..
노턴유틸리티들..

지금은 쓰지도 않는 기술들이지만 진지하게 공부한적도 있다.
이미 그때 하이텔의 고게동과 게오동에 가입해있었고 물론
천리안 게임동호회, 시뮬레이션 게임동호회, 비디오 게임동호회에도
가입해 있었다. 유니텔과 나우누리는 채팅만…

윈도우가 95가 나오기 전까진 정말 MDIR이나 윈도우나 큰 차이가
없었는데 윈3.0 3.1 쓸때는 그냥 아이콘 만드는 재미에..썼던것 같다.

제대로된 윈도우 프로그램이 없었으니 윈도우를 아무리 돌려봐야
도스 프로그램만 실행하고 기본메모리 확보가 중요한 도스프로그램이 윈도우 설치된 상태에서 돌아가니 잘 안쓸 수 밖에..

그당시 윈도우 실행명령어는 win.exe였다.

한때는 ANSI에 빠져서 요상한 코드들과 생쑈를 한적도 있었다.
그때의 안시는 지금의 플래시와 정말 놀라울정도로 개념을 같이 한다.

지금의 네이버 탑이라고 할 수 있는 천리안 하이텔의 탑 화면도
안시로 이쁜 화면을 보여주곤 했으니까..

또래들과 채팅을 많이 하면서 여러 유행어도 생겨났다.
지금의 3체 같은걸까..

채팅방에 들어가면 하이루 하고 방가방가는 자동이었다.
그러고 보니 진짜 웃기네..

이야기에서 지원하는 기능으로 말머리 말꼬리를 이쁘게 붙여서
채팅하는 애들도 많았다. 요즘처럼 이상한 채팅이 아니라
그땐 정말 다들 순진하고 또래들이 하는이야기를 밤새 할 수 있다는
즐거움으로 채팅을 했다.

이방 저방 돌아다니며 아는 친구들을 만났던 그 때..

디시인사이드나 웃대는 당연 유머게시판이었다.
이미지 첨부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대부분 글로 웃기는데
스타급 유머 작가도 많이 있었다.

XT를 처음 만지던 7살때부터 중3인 16살때까지..
일어났던 일들이다.

고등학교땐 자는 시간을 빼곤 학교에 있어야 했기 때문에
통신말고는 거의 컴퓨터를 하지 않았다..

글로 적자면 끝도 없는데 오늘 새벽에 노트북 화면을 보다가
몸만 훌쩍 커버린… 그러고 보니 노트북 사는게 내 국민학교
시절의 꿈이었는데.. 꿈을 이뤘네 ㅋㅋ

아직도 바깥에 아빠 차 소리에 귀 기울이는 내가 있는것 같아
써 본다..

아빠가 오기전에 빨리 컴터 끄고 자는척 해야 했던 그 때..

고등학교 시험기간의 주말엔 엄마아빠가 키보드를 숨겨버렸던
그 때..

왜 엄마아빤 내가 좋아하는 일을 못하게 했을까..
악기하나도 제대로 못다루고 자신있는건 달리기밖에 없는 내가
유일하게 좋아했던건데..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모든 경험을 할 수 있게 해준게
엄마아빠니까..

앞으로 5년 10년 뒤에는 얼마나 진보한 세상이 기다리고 있을까…
그 시기에 오늘을 생각하면 정말 피식 웃음이 나올 정도일까..

2배속 씨디롬을 달고 밤새 흥분해서 잠못이루던 때가 있었는데..
그것도 열정이었을까..

난 스스로 지금도 하는일에 열정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때처럼 잠도 못자고 설레이는 열정을 가지고 있을까?

난 그런 기억들이 많아서 지금도 그 이상의 설레임을 주고 있는
일을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없으면 만들어서..그렇게 살지 않으면 안될것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