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깨닫는 것이다. 똥인지 된장인지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게 생존에, 그리고 삶의 행복에 영향을 준다.
내가 특히나 성장에 집착하는 이유는 먹어본 똥이 많기 때문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남들보다 어렸을때 참 많이 찾아 먹었다. 하루 이틀 빨리 경험하고 하루 이틀 빨리 졸업했던 그 시행착오들이 오늘의 시간을 만들었다. 오늘도 여전히 실수하고 배우고 또 반복하지만 조금씩 좋아지는것에 위안을 받는다.
그러다 뒤를 돌아보거나 다른 사람들의 삶을 관찰할 기회가 생길 때, 안타까울 때가 많다. 특히 우리 나라 사람은 자기를 보는 시간보다 타인을 보는 시간이 많아 내 시각에서는 정상적이지 않은 삶의 방향을 가지는 사람들이 많다.
나는 이 모든 것들이 경쟁사회에서 비롯된 부작용이라 생각한다. 타인의 기준에 자신의 행복을 맞추기 때문에 스스로가 좋아하는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억지로 부여한 동기로 밀어올린 성과의 우위로 자신의 행복을 가늠한다. 그 경쟁에서 이긴 사람은 치졸해지고 진 사람은 찌질해진다.
경쟁에서 지는 사람은 거대한 열등의식에 빠져 인생 전체를 부정적인 에너지로 가득 채운다. 직장도 결혼도 아이도 열등의식을 극복하기 위한 선택에 불과하다. 때문에 거기서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그것들을 수단으로 우위에 있을 때 행복을 느낀다. 하지만 그건 상대방도 마찬가지… 언젠가 그들이 우위를 점하는 날이 온다. 이제 나의 직장, 가족은 나를 불행하게 만들 뿐이다.
그럼 경쟁에서 이기는 사람이 많을까? 아니면 지는 사람이 많을까? 그야 물론 지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다. 경쟁의 기준도 많지 않기 때문에 그야말로 모두가 패자인 사회가 된다. 점점 더 비열해 지고 유치해 지고 치사해야만 짧지만 작은 행복이라도 맛볼 수 있다.
이러한 인스턴스 행복은 돈으로 쉽게 살 수 있다. 하지만 성냥팔이 소녀의 성냥처럼 이런 행복은 금방 꺼져버리기 마련이다.
그래서 내 속을 채우는게 중요하다. 무엇이 자기의 인생인지 아는게 중요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럴수록 돈도 더 잘 벌린다. 될놈은 되고 안될놈은 안된다는게 이런거다.
한 번 열등감에 빠지면 그 세계에 갇혀버리게 된다. 어릴때 두들겨 맞던 사람은 평생을 운동에 집착하고 복수를 꿈꾸며 육체적인 허세만 부리고 정신적으로 성장하지 못한다. 좋은 대학에 가고 싶었으나 못간 사람은 평생을 학위나 타이틀에 집착하며 자신의 상황을 정당화 하고자 노력한다. 이런 열등감을 정당화 시키고 벗어나게 해 주는 돈 덕분에 우리는 또 다른 열등감을 얻는다.
내 주변에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다. 남을 의식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 아닌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많았으면 좋겠다. 만족하고 행복할 수 있는 삶을 사는 사람이 많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