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ylt – 7월23일

23일은 야한이야기가 들어있으니 주의해서 보셈–;

***

7.23

오늘은 수영을 갔다가 미친놈과 싸웠다.
그애는 싸가지가 없다. 나는 복수할테다.
오늘 또 손으로 빨래를 했다. 참으로 슬프다.
밥은 많이 먹었다.
쌀밥을 안먹어서 배가 고프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누워있는데 침대가 젖었다.
애들이 장난친 모양이다. 모자와 선그라스가 생겼다.
참 기쁘다.탁구도 했다.
디스코도 춘다. 듣기에는 재미있을것 같으나 참 재미없다.
시시해라. 그냥 독일어나 하겠다. 에아릭을 바보라 한다.
오늘 샤워했다. 그런데 13살 아이의 XX털이 났는데 XX는
이만했다.(그림) 실물크기이다. 그애는 이상한애다.
바보같이 생겼다. 쳐다보는것도 그렇다.
한국 아이들한테 편지쓰고 싶다. 그런데…
짐정리를 했다. 편지를 썼다. 또 살을 태웠다.
탁구도 하고 축구도 하고 모두 재미없으나 독일어를 할걸 생각하니..
엄마 아빠한테 영어,독일어를 배우고 싶다.
형하고 놀고싶다. 텔레비젼도 보고싶다. 대학도 가고 싶다.
바닷가에 있을때면 도르트문트가 생각난다. 저 언덕만 넘으면
우리집이 아닐까?
나는 곧이어 한국에 가고싶다. 눈에 선하다.

***

참으로 슬픈 11살이 아닐 수 없다..아니 12살이군..
저날은 참으로 많은 일이 있었다.

엄마아빠가 너무 보고싶어서 괴로웠던 기억이 난다.
하나밖에 없는 공중전화에 죽…줄을 서서
아껴둔 동전을 5마르크 동전을 넣고 전화를 한다.
신호는가지만 엄마아빠는 받지않고…공중전화를 나오는
내 눈에는 눈물이 핑..돈다.

이런식의 일기를 3주간 거의 매일 썼다.
지금 생각하면 귀엽기도 하고..ㅎㅎㅎ
정말 산만했었던것 같기도 하다.

너무 신기한건 일기를 읽으면 그 때의 기억이 모조리 되살아
난다는 것이다. 그 주변의 기억들과 함께..

뇌라는게 정말 신기하다…
기억이라는것..장기 기억이라는것은 마치 그림에 덧칠을 하는것
같다.. 얼핏 생각하면 생각나지 않지만 집요하게 파고들면
결국 모두기억해 낼 수 있다.

난 저 시절에 그리움을 배웠다..

sylt – 7월22일

나는 지금 침대 위에 있다.
점심때 참치가 나왔다(코미쉬)
아니 저녁에.
바닷가에 갔는데 옷이 젖지 않아 기뻤다.
바지를 3개 가져왔다. 1개는 긴바지 1개는
배린 반바지 1개는 지금 입고 있다.
이제 이것 배리면 입을 게 없다.
일기를 다 끝내면 엄마한테 편지를 쓰겠다.

나는 슬프다.
그 이유는 바지도 없고, 이곳 아이들을 보니
한국 친구들이 생각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14km를 걸었다.
내일은 수영을 간다.
벌써 엄마한테 1/2은 써놓았다.
집에 가고 싶다..
3주라니..

방을 바꾸었다. 더 넓다. 2층침대의 위다.
한국애같이 생긴 애들을 보면 이름을 부르고 싶다.
밥은 괜찮다. 친구들도,침대,선생님도
그런데 너무 심심하다.
특히 바지가 걱정이다. 1개가지고…
3주를 하라니. 무엇보다 성질나는것은 세탁기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양말도 못빤다.
젠장 이런걸 생각하면 집에 가고 싶다.

끝.

22일의 일기는 이렇게 끝나고 있다.
참치가 나왔다(코미쉬)
이부분은 당시 한국에 만 있는줄 알았던 통조림 참치가–;
독일에서도 나오니 신기했다는 말이었다.

이날은 한국친구들이 너무 보고싶었던 날인데 내 친구들과
꼭 닮게 생긴 동남아쪽 아이들이 몇명 보였기 때문이다.

옷도 많이 챙겨놨었는데 떠나기 하루 전 뭘 찾는다고
여행가방을 전부 풀었다가 집에 다 두고 와버린것이다..

지금이나 저 때나 나는 달라진게 없는건가..^^;

sylt – 7월21일

* 현실감을 높이기 위해 철자 및 띄어 쓰기는 당시 일기를 그대로 옮깁니다.

일기(기행문) 7.21

아침에 일어나서 버스로 갔다.
막타는데 누나가 왔다.
그래서 버스속에서 예기했는데 말이 안통해서 웃겼다.

버스를 타고 가다보니 재미있는 일이 많았다.
배로 갈아타고 쥘트에 내렸다.
그리고 버스도 갈아탔다.

쥘트의 섬들은 동화속에 나오는 집 갔았다.
지금은 어둡다.

버스에 내려서 자전거를 빼고 숙소로 갔다.
8명이 같이잔다.

또 바다도 갔다. 신발이 젖어 말리고 있다.
지금은 쓰레빠다.
다 빨아서 나뒀다.
그리고 탁구체가 좋다고 한다.
덴마크를 거쳐 버스도 배에 타고 갔다.
저녁밥은 잘먹었다.
지금 애들은 예기하고 있다.
END THE END ENDE

–; 이게 그날의 일기다.
지금 생각해보면 첫날은 버스타고 숙소 배정 받은거 밖에 없었다.
갈때 여행가방을 엄청 무거운걸 가져가서 무거워 죽을뻔했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내 몸만한 가방을 들고간 기억이 난다.

벌써 15년전의 이야기인데…바로 지금처럼 머리속에 떠오른다…

3주간의 캠프 – Sylt

독일에서의 한 학기가 지나가고 여름방학이 되었다.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내가 독일에 있었던 1년동안 가장 많은 일이 있었던
여름방학..

그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유일하게 내가 일기를 썼던 시간…
유일하게 내가 가족들과 떨어져 긴 시간을 보낸 시간…
말도 통하지 않고 부끄럼도 많았던 내가 다른 사고의 세계에
들어가 있던 시간들…
그리움이 무엇인지 몸으로 느꼈던 시간들이었다.

여름방학이 되어 나와 형을 적응도 시킬겸 엄마아빠는 캠프에
보낼 생각을 하는데..첫 3주는 내가 가고 그 다음 3주는 형이가는..
그런 계획이었다.

내가 캠프에 가 있는 동안 엄마아빠는 형과 유럽 여행을..
그리고 형이 캠프에 가 있는 동안은 내가 엄마아빠와 유럽 여행을
하기로 했다..

난 캠프를 간다는 사실에 너무 들떠있었고..
형은 가기 싫어했다..

나는 나중에 중요한 사실을 또 깨닫게 되는데.. 바로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 것..

마침 배낭여행을 온 서울 큰아빠네 큰누나와 며칠을 보내고
캠프를 떠나는 날이 되었다.

자기 자전거를 가져가야 하기 때문에 중고 자전거도 200마르크를
주고 구입했다.(20마르크였던가?–;)
애들한테는 잘 어울리지 않는 빨간 아줌마 자전거여서 조금 불만
이었지만… 캠프를 떠난다는 설레임이라니..!

앞으로 어떤 일들이 일어날지도 모르고 나는 떠나게 된다.
내가 갈 곳은 쥘트(Sylt).
독일에서도 대표적인 휴양지로 꼽히는 섬이다.

독일보다는 덴마크의 바로 옆에 있지만 독일에 포함되어 있다.
마치 발레리나가 춤을 추는 모습같은 쥘트.
육지와 철로로 연결되어 있다.

내 어린시절의 가장 큰 경험이 시작된다.

게스테 하우스

게스테 하우스는 영어로 게스트 하우스.
즉 손님의 집–; 이라는 뜻이다.

내가 1년간 살았던 그곳은 도르트 문트 대학의 게스테하우스 였다.
바로퍼 스트라쎄..

가장 신기했던건 집 열쇠가 현관문에 대응한다는것..
집 뒤로는 엄청나게 넓은 대학 캠퍼스가 펼쳐져 있고
집 앞으로는 수백년된 집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창밖으로 보면 끝없는 도시에 멀리 화력발전소인지의 굴뚝만이
바라보였다.

게스테 하우스의 지하에는 비발디라는 식당이 있었는데
참으로 맛이 없었던 기억이 난다–;

게스테 하우스는 5층인가 6층인가로 되어있는데
게스테 하우스의 꼭대기에는 그곳의 사람들이 각종 파티,세미나를
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고 바로 옆에 아이들을 위한 놀이방
비슷한 공간이 있었다.

이곳에는 많은 추억이 있어서 무엇부터 끄집어 내야 할지 모르겠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건 포근한 방안의 공기이다.
카펫이 깔려있어서 그런건지도 모르지만 집에 들어가면 언제나
포근한 냄새가 풍겨왔다.

그 건물 안에서는 3번인가 이사를 했는데 가장 넓은 방에서 부터
가장 좁은 다락에 이르기까지 .. 정말 재미있었다.

가장 넓은 방은 5B호실이었는데 부엌과 거실 방이 따로 있었던것
같다.
아빠랑 형이랑 거실에서 귤던지고 놀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가장 좁았던 6층에서는 지붕 아래 집이라 욕조에서 일어서면
머리가 부딛히고 온 가족이 한 침대에서 잠을 자야 했다.

나중에 미국에서 온 친구도 만나고 독일 친구들도 데려오고 했지만
처음 6개월은 형과 둘이서..때론 혼자서 추억을 만들어야 했었다..

독일의 시청(?)

독일에서 택시를 탄건 시청(?)에 뭔가 등록하러 갈 때였다.
관공서 쯤으로 해두자.

아직 독일에 전혀 적응이 안된 상태..
독일은 택시비가 무척 비싸다.

택시는 전부 밴츠!(가끔 아우디나 폭스바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터기가 기계식이라 좀 놀랐었다.
(한국은 언제나 말달리는 초록색 매터기..)

지금 생각해보면 외국인 등록 정도 되는 절차였던거 같은데
엄마가 형이랑 나한테 그곳에서 뭔가를 묻거들랑 꼭
대답하라고 했던 말이 15년이 지난 지금도 생각난다..

Woher kommst du?
라고 물으면..
Ich bin aus Korea gekommen!
이라고 ㅠㅠ

하지만 예상과 달리 그곳에선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아주 인상깊었던건 그 관공서에서 일하는 직원이 난장이 였던것.
더 놀랐던건 그 난장이 아저씨의 헤어스타일이 옆머리는 모두
밀어버리고 가운대 머리만 새워서 녹색으로 염색한 스타일
이었다는 것이다.

아저씨와 악수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시청에서 기다리는 동안 독일 환타를 자판기에서 뽑아 먹었는데
너무 맛이 없었고, 나오는 길에는 하리보 콜라맛을 사먹으면서
나왔다!

이렇게 무사히 독일에 등록(?)을 한 11살 꼬맹이..

골프광? Wolfgang

엄마친구의 독일인 남편 골프광..

그당시엔 ‘아..역시 독일이 잘 살아서 워낙 골프를 많이 치니
별명으로 골프광이라고 부르는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알고보니 이름이 볼프강(Wolfgang)이었던것이다–;

볼프강 아저씨의 가족은 모두 4명.
아저씨,아줌마(엄마와 친구),야스민과 나타샤 두 딸이 있었다.
야스민은 나와 형의 중간나이. 즉 나보다 한살 많았고
나타샤는 한참 어렸는데 당시로 5-6살인가 그랬다.
(당시 본인 11살–; 나타샤도 이젠 벌써 20대인가? ㅠㅠ)

볼프강 아저씨의 취미는 RC비행기 만들고 날리기.
가끔 아저씨와 아저씨 차를 타고(피아트 였던가..) RC전용 비행장
에 가서 비행기 날리는걸 구경하곤 했다.

아저씨 집의 지하실엔 아저씨의 작업실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나무를 깍아 직접 비행기를 만들곤 했다.

야스민과 아저씨가 친구처럼 허물없이 이야기 하고 장난도 치는걸 보면서
참 다정하다고 생각했다. 우리집도 허물없이 지내는 편이지만
야스민과 아저씨만큼은 아니었으니까..

야스민은 나이가 있어 우리랑 어울리는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우리도 마찬가지..더구나 남자여자 편가르던 한국 국민학교에서
바로 독일로 온터라 여자들과는 친하고 싶지 않았다.–;

나탸샤는 어려서 그런지 아주 귀여웠는데 금발이었던걸로 기억
(야스민은 갈색?) 집에 어딘가에 사진이 있을건데 나중에
한번 찾아봐야 겠다.

11살 꼬마의 이별

경양국민학교 4학년 6반 반장!
1990년 내 나이 11살.

‘독일에 가서 좀 있다가 올까..’

가끔 밥먹을 때 아빠가 하던 이야기는 이로서 2년째다.
예전에도 친구들한테 잔뜩 자랑했다가 무산된 적이 있어서
별로 믿고 있지는 않았다.

그냥 언젠간 갈 수 있을까? 라는 생각 뿐.

1990년 10월 3일 동서로 분리되어있던 독일이 극적으로 통일되었다.
그와 함께 아빠의 결심도 굳어진것 같았다.

지역개발을 전공하는 아빠로서는 분단국가였던 우리나라와 독일.
특히 통일 이후의 독일을 연구하는건 대단히 중요한 일이었을 것이다.

우리 가족은 그 길로 4학년 겨울 방학을 1주일도 남겨놓지 않고
독일로 갔다.

서울로 가는 전날. 학교를 나오는 나를 친구들이 교문까지 배웅해
주었다. 물론 남자들만!

당시의 국민학생들은 남자 여자 편가르고 싸운는 일이 많아서
오직 남자애들만 배웅을 나왔던것.

그렇게 교문에서 빠이빠이를 하고 흥분된 마음을 안고 집으로
왔다.

2주정도 전부터는 엄마한테 독일어를 배웠었다.
유일하게 할수있는건 알파벳을 쓰는것과 읽는 법 정도였다.
다행히 독일어는 읽기가 아주 쉬워서 뭔가 되어간다는
느낌이 들 정도 였다.

형과 나의 짐속엔 당시 유행했던 용소야 만화책도 들어있었다.
권법소년 용소야에서 좀 발전한 축구 소년 용소야..

김포로 가는 광주공항에서 대낮에 형이랑 아주 큰 유성을
본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태어나고 3개월정도 있다 비행기는 타봤다지만 전혀 기억에 없고,
떨리는 맘으로 김포행 비행기를 탔으나 비행시간이 짧고 너무
흥분해서 마치 놀이기구를 탄 듯 김포에 도착했다.

그렇게 서울 호텔에서 하루를 보냈다. 엄마아빠가 뭔가 하러갔었나..
나와 형은 호텔 복도에 쪼그리고 앉아 용소야 만화책을 봤다.

다음날 독일로 가는 대한항공 비행기에 올랐다.
국내선과 비교도 안되는 점보기.

창밖으로 펼쳐지는 어마어마한 풍경에 넋을 잃었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을까..
독일 프랑크 프르트 공항에 도착했다.

그때부턴 아주 정신이 없었다.

아빠 후배라는 분과 엄마 친구 남편이 우리를 마중 나왔는데
우리가 갈곳은 프랑크 프르트에서 2시간(기억잘 안남) 정도
차를 타고 가야 하는 도르트문트라는 곳이었다.

축구 팬이라면 이 마크를 기억할것이다.
도르트 문트를 연고로 하는 축구팀~!

암튼 당시 듣기로 “골프광” 이라는 사람과 아빠 후배라는 사람의
BMW를 타고 도르트문트의 아빠 후배 집으로 향하였다.

아우토반의 엄청난 속도와 우리가 타고있는 BMW의 엄청난 속도에
놀라면서..

나의 독일 이야기.

독일과 나는 특별한 인연을 가지고 있다.

엄마 아빠가 결혼한 곳.
내가 태어난 곳이 독일.
그리고 나의 12살을 보낸 곳.

어찌보면 짧은 시간이지만 아직도 내 어린시절의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있는게 독일 생활이다.

나이가 들어 다 까먹기 전에 기억나는대로 적어볼 생각이다.

돌이켜 보면 벌써 15년이나 지났는데 우리나라는 그 당시의
독일 문화 수준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우리 나라도 나름대로 색이 있어 1:1로 비교할 수 는 없겠지만
조금 아쉬운 기분이 드는건 왜일까.

생각나는대로 조금씩이라도 내 기억을 기록해 보자.

Bubba Gump

도쿄돔 시티에 있는 새우 요리집.

포레스트 검프에 나왔다는데..

각종 기념품도 같이 판다.

홍기형..

영화에 빠져있는 정환

가게 입구

가게 입구2

이렇게 두면 그냥.

이렇게 하면 점원이 온다-_-

탁구채 메뉴

귀여운 디자인의 설탕

새우!

새우!

새우!!!
배터지게 새우를 먹었다.

가게 바깥의 기념촬영장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