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기억

네이버블로그 – 2004/12/19 00:09

더 이전의 기억이 있었던것 같은데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기억은 아마 내가 3살때의 기억일것이다.
2살때일지도 모르는데 4살때의 기억이 생생한걸로 미루어 3살일 가능성이 크다.(1982년 ㅠㅠ)

난 1980년에 독일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이건 기억에 전혀 없으니–;).

8개월을 살고 한국으로 왔는데 역시 기억에 없다.(당연한가?)
당시 독일에서 장난감으로 사가지고 온 빨간색 밴츠 자동차 장난감이 있었다.
꽤 큰 장난감이었는데 플라스틱으로 디테일도 좋았던것 같다.

이 장난감은 형의 소유–; 였는데 자동차 꽁무니에 전선이 나와있고 리모콘과 연결되어있어서
자동차를 조종할 수 있는 물건이었다.

이 자동차의 가장 재밌는 기능은 헤드라이트가 켜진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낮에 보면
잘 안보여서 우리는(형과 나) 밤에 자동차를 가지고 놀곤 하였다. 물론 엄마아빠한테
두꺼운 커튼을 쳐서 어둡게 만들어 달라는 요구와 함께(그 땡땡이 커튼 아직도 기억나~)

그리곤 재미가 없어지면 차를 뒤집어서 영사기 흉내를 내곤 했다.
아빠가 독일에서 가져온 영사기(당시에 고가)로 가끔 디즈니 만화를 보여주곤 했기때문에
(아쉽게도 기억은 없다. 영사기가 있었다는 사실만 알뿐)
차를 뒤집어 두고 그 흉내를 냈었던것 같다. 바퀴도 돌아가는게 제법 영사기 비스끄므리
했던 기억이 난다.

난 꼬맹이어서 형뒤를 졸졸 따라 다니다 리모컨 버튼 한번 눌러보는게 전부였지만
깜깜한 어둠속에 반짝이던 불빛의 기억이 머리속에 아직도 선명히 남아있다.

그밖에 눈오는 밤의 기억이 나는데
이게 티비를 보고 내 머리속에서 지어낸 기억인지 신뢰할 수 없다.
그러고 보면 태교라던가 1,2살때 아기에서 주는 사랑같은건 별 소용이 없을거 같다.
인격 형성에 도움이 될것 같지만 사실 전혀 기억이 안나고 내 생각에 내 성격이 생기기 시작한것은 적어도 5살때부터 였던것 같다.
4살 이전에는 동물의 행동양식과 별 다를게 없었던것 같은데..

오늘은 이상하게 예전 생각이 자꾸 난다.
나중에 기억 안날까봐 다 써놓고 싶지만 사실 난 잘 잊어버리지 않는다…

연화유치원

네이버블로그 – 2004/12/18 23:57

난 숫자나 내 관심밖에 일을 기억하는데는 바보수준이지만,
과거의 기억이나 흥미있었던 일들은 아주 잘 기억하는 편이다.

5살때의 기억은 아주 많이 머리속에 남아있고 4살때의 기억도 생생하게
남아있는 부분이다.

특히 5살때는 여러가지 일들이 많았기 때문에 순간순간을 기억해 내는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내가 정식으로 유치원에 다니게 된것이 5살때였다. 4살때는 형을 따라 가끔 유치원에
따라간 적이 있었다.

내가 다니던 유치원의 이름은 연화유치원이었는데 아직도 유치원에 간 첫날이 기억난다.
노랗고 연두색의 가운을 입고 노란 모자를 쓰고 노란 가방을(크로스백) 메고
유치원 놀이터에서 7명의 친구들과 사진을 찍었다.

아마도 내가 1-2주 정도 늦게 들어가는 그룹이라 그렇게 했었나 보다.
지금 내가 직장에서 조용히 있는것처럼 그 때도 웃기만 하고 조용히 있었던 기억이 난다.
(나중엔 안그러지만)

불교쪽 유치원이었기 때문에 유치원 입구(사실은 절 속이었지만)에는 절이 있었는데
그곳엔 비구니(추정나이 15세)가 있었다. 우리는 이 누나를 귀신으로 불렀는데 아마
불상의 무서운 모습과 향냄새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때 우리는 비둘기호를 타고 교외로 놀러가기도 했고 고구마를 뽑기도 했으며
김장을 담그기도 했었다. 어린이날이나 부처님 오신날 행사때는 사탕으로 만들어진 목걸이가
목에 걸리고 색종이와 도화지로 만든 멋진 왕관이 머리에 씌워졌었다.
노란 가운을 입고 항상 그림을 그리거나 가끔 릴레이 체육대회,씨름을 하기도 했다.

난 그런 일련의 활동들을 무난히 별다른 사고없이 조용히 치루었던것 같은데 내가 유일하게
못하는것이 있었다면 당시 유행했던 제리포를 잘 못먹었다는것이다.

제리포는 기술이 좋아야 한번에 츄릅- 하며 삼킬수 있는데. 나는 그게 잘 안되서 혀로 빨아먹으려다항상 낭패를 보곤 했다.

살다보면 다음에 해야지..하고 남겨둔 부분이 나중에 꼭 문제가 되는 때가 있다.
제리포 먹는법을 형한테 배워나야지…하고 미루던 어느날 유치원에서 다른 반 아이들과
릴레이 대회가 열린것이다.

반환점에는 제리포가 가득있고 우리들은 반환점까지 가서 제리포를 다 먹고 돌아와야 했다.
나는 달리기를 잘하는 편이어서 제리포가 있는곳까지 빨리 갔지만 그놈의 제리포!!!!
도저히 못먹고 게임 진행이 안되어 슬프게 제리포도 다 못먹고 돌아와야 했다.

또 유치원에 가면 친구들은 서로의 장난감을 자랑하기 바빴는데 당시 유행 1위였던 장난감은

자전거 장난감이었다. 뒷바퀴만 쇠로된 조그만 자전거는 두발임에도 불구하고 쇠바퀴의 힘으로
굴리면 휙- 잘굴러가는 그런 장난감이었다.

조잡하기 서울역에 그지없는 장난감이지만 어찌나 가지고 싶던지. 뭔지 잘 생각안나지만
친구가 이빨로 잘근잘근 씹어 핸들이 너덜해진 그 자전거를 나의 무엇인가와 바꿔온 기억이
난다.

또 연화유치원에서 기억나는 일은 어딘가로 놀러가서 하루밤 자고 온 일이다.
이건 내 앨범에 사진도 있어서 더 생생히 기억할 수 있는데, 당시 난 얼굴에 뭐가 많이 나서
부모님을 안타깝게 하던 시절이었다. 이름은 기억안나지만 단짝 친구도 있어서
잘 지냈는데, 밥먹기가 싫어서 괴로워 했던 기억이 난다. 먹기싫은걸 억지로 꾸역꾸역 먹었다.

많은 일이 있었지만 다 쓸 수 없을것 같다.

5살때의 추억들을 생각하니 다른 추억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오른다.

1984년 내가 5살때의 추억들…20년 전의 추억들이 내 뇌세포 어딘가에서 어떤 형태로 저장되어
있다가 그 주위에 어떤 자극을 받아 술술술 흘러나오는 것일까?

내 기억이 시작되는 최초의 시점을 생각해 봐야겠다.
곰곰히…..

내 기억의 시작은 어떤 사건일까?

2005년10월16일 담양

감을 따는 아빠

벼가 무르 익었다. 우리 벼는 아니지만..

가을 이라면..

엄마 아빠와 함께 오른 뒷산

집에서 운전해서 30분만 나가면…

가을에 빠질 수 없는 아이템

수많은 물고기 때..사람을 무서워 하지 않는다.

코스모스가 손짓한다는 말의 의미

다리일까..?

소녀시절로 돌아간 엄마.

멋진사람

2004/12/07 00:38 – 네이버 블로그

내가 꿈으로 삼았던 모습중에 하나는 아침에 책한권을 들고
도서관에 들어가서 도서관에 나올때는 그 책을 머리속에 완벽히
담아서 나오는 모습이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하루에 여러 약속을 잡지 못하고
여러가지 일을 처리하지도 못했다.

마음만 그랬었던건지..하루에 한가지 일을 끝내면 아무리 시간이
많이 남아도 다른일을 하고싶지 않았다.

물론 내가 한가지 일을 끝낼만큼 목표도 작았었을것이다.

고등학교때는 위의 꿈꾸던 모습을 실천해본적이 몇번있었다.
다름아닌 문제집..

문제를 푸는것에는 성공했지만 머리속에 넣는것에는 대실패했다.
엉덩이에 종기만 났을뿐..

그 뒤로도 간간히 그런 시도를 몇번 해봤지만 성공한적은 별로 없었던것 같다.

중요한건 처음부터 모두 얻어내려하기보다는 저러한
시도를 꾸준히 해야한다는것이다.
그러므로 무리한 목표보다는 내가 극한에 다다를 수 있는
적절한 목표를 세워야한다.

그래서 시작한 일이 나를 알아가는 작업이었다.
나를 알아야 내 한계를 알고 내 능력을 알고 비로소 적절한 목표를
세울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이게 잘못이었다.
내가 나를 아는것은 참으로 힘든일이라는것은 알았다.
그리고 내가 다른 사람을 안다는것도 너무 힘든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내가 다른 사람을 안다는것은 그냥 그사람의 행동 말 등에서 느껴지는
이미지의 단편일뿐이고,
내가 나를 안다는것은 그냥 그렇게 되고싶다는 생각밖에 안되기 때문이다.

결국 결론은 그나마 아주 긍정적으로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로 내리기로 했다.

아주 오만한 생각이지만 내 나이에 못할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좀더 4가지 없이..나라면 다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중요한건 무엇을 하느냐는 거지 어떻게 하느냐는 고려할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무엇을 하게 된다면 바닥을 파고 뿌리를 뽑아
그 존재 자체를 내 세포의 일부로 만들어 버려야 겠다.

는 생각을 예전에 한적이 있다….

HARIBO

2004/11/28 20:26 – 네이버 블로그

하리보 막흐트 킨더 프로~ 운테에바세네 에벤조~
HARIBO MACHT KINDER FROH UND ERWACHSENE EBENSO

15년전 독일에서 TV를 보면 저 CM송을 자주 들을 수 있었다.
지금은 우리나라 백화점 수입코너에서 볼 수 있는 구미베아(예전 우리나라 꼬마곰 과자)

내가 독일에 있을 때 정말 맛나게 먹었던 과자다(제리류?)
탁구배우러 가는 길에 있는 목장의 말에게 가끔 먹여주었던 기억이 난다.
귀신같이 알아듣고(한국말을) 잘 따르던 말이었는데..

종종 백화점에서 사먹곤 했는데, 이번에 어머니 친구분이 집에 놀러오셔서 주고 가셨다.
똑같은 포장에 똑같은 맛. 우리나라로 보면 새우깡 수준의 장수 식품인데. 아마 그보다 더
오래 되었을 것 같다.

독일TV를 보다보면 본 방송 중간에 광고 시간이 좀 특이한데 광고 하나 만화 하나 이렇게
돌아가면서 나온다는 것이다.

중간에 나오는 만화는 주로 캠페인이나 재미있는 에피소드로 이루어 졌던것 같다.
(아마 독일의 KBS인 ZDF채널 이었던듯)

그런데 놀라운건 그 만화에 나오는 케릭터가
1980년 이전에 만들어진 케릭터라는 것이다.(이름모름)
내가 태어나서 한국에 들어올때 엄마아빠가 가져온 인형이 그 케릭터 였으니..

그리고 고2때인가 독어 경시대회에 나가서 독일 문화원에 갈 기회가
있었는데 거기에서 본 ZDF채널은 그 때 그대로 였다.

기회가 되면 독일에 들러보겠지만 그곳은 내 기억이 있던
15년 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으리라 확신한다.
우리나라는 아직도 시민의식이나 질서 등 많은 부분에서
15년전의 독일의 반도 못따라가고 있다.
우리나라가 20년 혹은 30년 후에 지금으로부터 15년 전의
독일과 같은 시민의식이나 질서를 가지게 된다고
생각했을 때 조금 우울해지긴 하지만 우리나란 우리나라만의 매력이 있으니까!

간만에 구미베아를 먹다 옛날 생각이 나서 이러고 있는데..
눈에 선하다..그때의 기억들..

소풍날과 운동회날의 향기

2004/10/27 15:25 – 네이버 블로그

내가 기억하는 향기(냄새)는 실제 냄새라기보다 어떤 느낌으로 기억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소풍날 아침이나 운동회날 아침은 뭔가 공기에서 다른 냄새가 난다.

쉽게 설레여 하는 나로서는 그런 냄새가 나는 날이 무척 좋다.

아니면 계절의 냄새..

특히 가을과 겨울의 냄새는 다른 계절과 구분할 수 있을정도로 특이하다.
내가 무척이나 냄새에 민감하고 잘맡고,구분해서 그러는지는 모르지만
조금 특이한 냄새를 느끼는건(맡는다기보다..) 내 마음의 긴장이나 흥분이
한 몫을 하는것 같다.

하지만 매번 같은 냄새로,때론 추억을 불러 일으키는 그 냄새는 내 느낌의
결과물이라기 보다 실제하는 냄새가 아닐까?

어느날 길을 걷다가 계절의 냄새를..소풍날의 냄새를 맡게 되는 날도 있기 때문이다.
아니면 어린시절을 문득 떠오르게 하는 그런 냄새를..

실제로 남들도 맡을 수 있는 냄새중에 내가 제일 좋아하는건 소중한 사람들의 냄새이다.
엄마아빠 이불에서 나는 말로 표현못할 포근한 냄새.
여자친구의 머리에서 맡을 수 있는 머리가 아득해지는 냄새.
형의 자취방에서 나는 어지럽지만 밝은 냄새.

자살

2004/10/28 00:07 – 네이버 블로그

나를 아는 사람중 한분이 오늘 메세지로 안부를 물었다.

이유인즉, 내가 자살하는 생생한 꿈을 꾸었는데 괜찮냐는 내용이었다.
나를 잘 아는 사람인 만큼 내가 자살을 결심했다면 실행했으리라는 생각에
더욱 걱정이 되어 물어보았을 것이다.

사실 나는 죽음이란것에 대하여 어린시절부터 많이 생각했고 나름대로의 결론을
가지고 있다.

내가 사랑했던 존재들의 많은 죽음과 내가 혐오했던 존재들의 죽음…다른 사람들의
죽음을 접하면서 내가 느꼈던 것은 그리 크진 않았지만 죽음이라는 사건이 주는
약간의 또는 아주 큰 충격에 지나지 않았던것 같다.

생명의 신비를 미처 깨닫지도 못하고 상상조차 못하는 것처럼 죽음이라는 것도 엄청나게
상상조차 못할 만큼의 거대한 사건이라는 사실을…

어려서부터 호기심이 많았던 나는 죽음 뒤의 세계가 너무나 궁금해서 비닐봉지로 숨막히게
혹은 이불속에서 숨을 안쉬며 죽어볼려고 노력해본적이 있었다.

나중에 공부를 좀 하게되었을때는 경동맥을 손으로 막아 반 혼수상태에 다다른 경험도 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약간의 정신병 기질도 있었던것 같다.

하지만 나에게 죽음 뒤의 세계는 너무나 궁금하고 체험해보고 싶은 세상이였고 무언가
지금과는 다른것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컸다.

아마도 자살을 하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이런 생각으로 자살을 택하지 않나 싶다.

지금은 소중한 존재들을 이유로 죽음에 대한 호기심을 억누르고 있지만 내가 이런 정신상태로
늙어 죽음에 이르게 된다면 심장을 두근거리며 죽음을 맞이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런면에 있어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타나토노트나 나무에 나오는 뇌만 살아있는 아저씨의 이야기는 내 어린시절 상상했던 모습들을 잘 보여주고 있다.

가끔..아주 가끔 문득 생각이 난다.

‘참 신기하기도 하지..나라는 동물이 이렇게 행동하고 있어..’

언젠가 밝혀질까? 뇌의 메카니즘 이라던지..인류존재의 이유라던지..

Running

2004/10/21 18:12 – 네이버 블로그

나한테는 위로 형이 있다.
아들만 둘. 우리 형제는 달리기를 무척 잘한다(지금도?)

형은 조금 더 잘달려서(같은 나이의 나와 달렸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중학교때까진 선수생활도 했다.

그런 나와 형이 같은 고등학교를 다녔는데 내가 1학년 형이 3학년 이었다.

봄에 열리는 체육대회..
나는 100m 200m 400계주 멀리뛰기 에서 이미 4관왕을 차지한 상태..
형은 고3이라 (당시는 공부에 열중하고 있었다) 400계주만 출전하기로 했다.

1,2학년 400계주가 끝나고 운동회의 마지막 순서인 3학년 400계주가 시작되었다.

형은 마지막 주자.. 두두두 사람들이 달린다. 형 반은 꼴등이다.
마지막 주자의 차례가 되었다. 이미 선두주자는 반바퀴 이상 차이..

마지막 주자는 한바퀴 반을 돌기때문에 아직 한바퀴가 남아있었다.

형은 정말 바람처럼 달렸다. 사람이 지나가면 발에 차인 모래만 머물렀다.
선두가 자만해서 허허 거리면서 뛴것도 있었지만 결국 형은 1등으로 들어오고야 말았다.

‘와!!!!~~!!!’

전교생이 주목하는 그 순간의 모습이란..

형이 졸업한 이후로도 난 꾸준히 1등을 했지만 그때와 같은 감동 (모두가 공감하는) 은일으켜본 적이 없다.

지금의 나는 배도 좀 나오고 무릎관절 수술에 꾸준히 하는 운동없이 많은 시간이 지나
나에게 주어졌던 유일한 재능인 ‘달리기’를 더이상 나만의 재능,특기라고 말할 수 없지만
언젠가..빠른 시간안으로 내 노력으로 이루어진 또다른 재능으로
많은 사람을 감동시킬 꺼리를 만들고 싶다.

유성

2004/08/20 12:01 – 네이버 블로그에서..

얼마전 화려한 우주쇼라고 해서 유성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지금 우리집은 시골중에 시골이라 별이 많이 보여서 엄마랑 둘이 유성구경이나
해볼까 하고 집밖으로 나갔다.

가로등도 없는 논길로 갈려고 도로를 건너는 순간 믿기힘들정도로 큰 유성이
떨어지는걸 봤다.

“우르르르르르르 콰콰쾅~~~”

뭔가 이런소리가 나야할 규모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너무나 조용히..
그리고 빨리 더구나 멋진 초록색 불타는 꼬리를 남기고 사라졌다..

엄마와 난 경악했다.

사실 이런 유성을 본건 이번이 두번째이다.
때는 바야흐로 1990년..(맞나?) 국민학교 4학년 겨울방학 직전이었다.

1년간의 독일 생활을 위해 광주공항에서 서울김포로 비행기를 타기위해
막 광주공항에 도착했을때였다.

처음 비행기를 탄다는 설레임과 외국에 간다는 설레임(사실 첨은 아니지만 기억에 없으므로)
으로 너무너무 흥분해 있었다.

공항 청사를 들어가는 순간 나와 형은 약속이나 한듯 하늘을 보게 되었는데..

마침 지나가는 정말 거대한 물체..노란 불꽃꼬리를 태우며 무섭게도 조용히 1-2초정도
(사실 더 짧았겠지만 느낌상..) 머리위로 지나갔다.

당시 유행하던 축구소년 용소야 시리즈를 보며 축구선수가 되어야 겠다는 꿈을
꿀정도로 순진무구했던 형제는 급기야 그것을 UFO로 착각하고…

가벼운 소동을 벌리고서야 진정했는데..

그게 유성이라는걸 알게된건 그로부터 5년도 지난 후일것이다.

그나저나 그당시 용소야 시리즈는 대단했는데..
나중에 당구 시리즈도 나온걸로 안다..

지금생각해보니 일본 만화인거 같은데 항상 만화책에는 글그림 전성기
라고 쓰여있었다.

진실일까..?

나뭇잎사건

내가 운암동 주공아파트에 이사왔을때이고.
내가 잠시 유치원 휴학중이었을때니..6살때로 기억된다.
(난 5살과 7살때 유치원을 1년씩 다녔다.)

때는 1985년 계절은 잘모르겠다.
6살 꼬맹이가 집에서 뭘하겠는가..

매일 엄마 집안일하는거 쫓아다니면서 힘들게 하고..
자고..먹고..자고..혼자 집앞 놀이터에서 흙장난하고–;;
때로 엄마와 함께 시장에 가기도 하였는데..

문제의 그날이었다.

엄마는 무엇을 사러간다는 목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변에 싼 물건이
많이 보이면 이곳저곳 많이 들려서 가는 스타일이다.
콩나물을 살려고 콩나물 파는 할머니를 찾아가는데..
아휴..왜이리 이곳저곳 많이 들리는지..
당시 엄마 발걸음은 무척 빨랐고 또 짧은 내 다리로는(당시 6세) 엄마의 걸음을 따라가기
무척 힘들었다.

그런 나를 엄마는 시장바구니끌듯 이리저리 휙휙 끌고 다니기 일수였고 난 아픈다리와
어린마음에 울음을 터뜨리기 일수였다.

그렇지 않아도 어린시절의 장난으로 콧물이 잘 나오던 그때..(요이야긴 나중에..)
징징울기까지 했으니 콧물이 줄줄 흐르는건 우째야 하나..
소매로 쓱 닦고 또 닦아 봤지만 더이상 닦을수도 없다..

할수없이..

‘엄마 휴지 ㅠㅠ’

이렇게 엄마를 불렀다.
엄마는 나를 쓱 보시더니..이름모를 조그만 나무앞에 섰다..
나뭇잎은 무척 컷던 그 나무.
길가에 있어서 누런 흙먼지를 가득 뒤짚어쓰고있던 그 나무.

설마..

했지만 엄마는 나뭇잎을 따다가 내 코에 대고 ‘흥~~~’ 이라고 말씀하셨다.

흑흑흑

명색이 외국물도 좀 먹고..(생후 3개월까지) 비행기도 타봤던(생후 8개월) 나인데…
여기서 무너지는구나..
그래도 나는 팽~~코를 풀었고 눈물을 닦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
.

가끔 가족이 산책을 갈때 콧물이 나올려치면 난 엄마손을 놓고 아빠한테 달려간다.

‘아빠 코~’

라고 하면 아빠는 멋진 향기가 나는 따뜻한 손수건을 주머니에서 빼서 줬기때문이다.

손수건과 나뭇잎–;;

이 극복할수 없는 차이때문에 잠시 엄마를 미워한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시절 엄마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지금은 10%정도 이해하기 때문에
너무너무 감사할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