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일본

국민학교 5학년때 독일에 1년간 살 기회가 있었다.
어린시절이었지만 독일이라는 나라에서. 말도 통하지 않는 어린꼬마가
속으로 생각할 시간이 많아지는건 당연해서인지 당시의 일들중에는
기억나는 일들이 무척 많다.

내가 살았던 곳은 게스테 하우스(guest house)라고 외국인 초청,교환 교수들이
잠시 머무는 곳이었다.

독일 사람은 전혀 없지만 대부분 다른나라 사람들(인도,미국 등)이 살았는데..
우리가 이사오고 얼마되지 않아 일본과 미국 사람이 들어왔다.

일본 사람은 딸둘(당시 나보다 조금 어린걸로 기억)
미국 사람은 아들하나 딸하나 인거 같다.

일본 사람은 같은 동양인인 우리와 친하게 지내려거 많이 노력한거 같다.
자기 집에도 초대하고..명함도 주고받고.(나중에 한국에 와서도 엽서를 받을 정도였으니..)
그리고 일본사람은 정말 매사에 인사…예의..
남에게 피해주지 않으려는 노력을 행동하나하나에서 볼 수 있었다.
아이들은 어른들 이야기하는자리에서 입도 열지 않았고..그나이 또래가 대부분 하는 투정이라던가
짜증없이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리고 복도나 밖에서 그 아이들이 시끄럽게 놀거나(거의 보이지 않았다)하는 경우는 없었다.

반면..

미국 사람은 자기들끼리도 잘 놀았거니와 전혀 남을 개의치 않았다. 나보다 조금 어린거 같았던
아들놈은 나를 몇번 보더니 나랑 놀고 싶어했다. 중요한건 그놈이 영어로 당연하다는듯이
하는 말들이었다. 영어든 독어든 내가 못알아 듣는건 마찬가지라 상관없지만 나는 왜 그놈한테
내가 하고 싶은 말들은 독어로 해야한다고 생각했으며 말을 못하면 한국말로라도 해야할
생각을 안했는지 모르겠다.

미국 사람들은 일본사람들과 정확히 반대였다.

나는 미국 사람 아들놈하고 갖은 사고는 다 치고 다녔다. 지하주차장이 자동으로 닫히는데
그 틀을 타서 속에 들어가 보기도 하고 좁은 건물 벽에 다리를 걸치고 위험스럼게 3층까지
기어올라가기도 했다. 꼭대기 층 바로 밑에 사는 미국사람집 창문으로(지붕에 창문이 있었다)
공을 골인시킬려고 공을 뻥뻥 차다가 다른 집 사람들로 부터 미친놈 소리도 들었다.

말은 안통했지만–; 그러던 어느날 이놈이 나를 자기집으로 데려갔는데.
역시 그 아버지나 나한테 영어로 이야기를 하며 체스나 한판둘까? 라고 말하기도 했다.
(알아듣진 못하고 체스판을 내오길래 그런줄 알았다)

그후에 이사람들이 떠날때까지 언제나 이런 모습이었는데..일본사람들은 눈에 거의 보이지
않았고. 미국 사람들은 어디에서나 눈에 보였다.

맨 위층에는 게스테 하우스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이용하는 휴게실이 있는데 이곳에 30여개정도
되는 쇼파가 있다. 이 쇼파는 매트리스처럼 침대로 변신하는 쇼파인데 나랑 우리형은 이 쇼파를
가지고 가끔 집짓기 놀이를 하고 놀았다(터널도 만들고..)
어느날 꼭대기 층에 올라가보니..어마어마한 규모의 쇼파집(?)이 완성되어 있었다.

그곳에 있는 모든 쇼파를 분해해서 꼭대기 층 전부를 덮어버린 집이었는데..
놀랍게도 그 집은 미국인 아빠가 만든것이었다-_-;
그리고 우리가 보는 앞에서 그집으로 다이빙해서 모두 무너뜨려버렸다. 그 미국인 교수가…
미국과 일본이 세계 강대국1,2위로 알고있었던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조용한 나라 일본. 언제나 시끄럽고 눈에 뛰는 나라 미국.

일본과 미국은 1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그렇게 세계를 움직이고 있다.
국민성이라는건 정말 존재하는것이고 이 공통된 기질이 어디서 부터 나오는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국민성이 그 나라의 경쟁력을 결정하는 것임은 분명한 것 같다.

나는 가끔 내가 한국인임을 부정할때가 있다.
한국인의 부끄러운 모습을 볼때.
하지만 다른 나라 사람들이 우리를 볼때는 내가 그들을 그렇게 보듯이 우리의 국민성으로
나를 볼것이 분명하다.

또 내가 그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것도 분명할것 같다.

어릴적엔 그림을 보면..

엄마가 동화책을 읽어주던 때가 있었다.

내가 4-5살때쯤..형이 학교다니기 전이니까..

엄마가 읽어주는 동화에 취해있다가..
그림이 나오는 면을 보게되면 그 그림으로 빠져버릴때가
있었다. 사소한 점 하나라도 나에겐 큰 의미로 다가왔었다.

캐릭터의 눈이 향하는 방향에서..그림자를 표현하기 위한
사선들도 나에겐 하나하나의 의미였다.

동화는 그때부터 시작이다. 나만의 동화가 시작되는것이다.
주인공은 바뀌고 엄마의 책읽어주는 소리는 더이상
들리지 않는다. 빨리 다음장을 넘겨 다른 그림이 나타나길
기다릴 뿐이다.

상상의 속도는 의외로 빨라 엄마가 한페이지를 다 읽기도
전에 모든 상상을 다끝내고 다음페이지에 나올 그림을
또 상상하며 거기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그 속도란 이미 한페이지에서 책 한권을 다읽은것 같은
어떤 감정에 충실함을 받을 정도였다.

페이지는 넘어가고 내가 상상해놓은 몇가지의 이야기들과
새로나온 그림을 맞춰보기 시작한다. 대부분 맞는 경우가
없어 그 페이지부터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하게 되지만,
때로 내 상상과 그림이 맞아 떨어질때 나는 내가 어떤
천재 어린이라도 되는양 씩 웃으며 엄마를 한번 바라보았다.

그럴때쯤이면 엄마도 꾸벅 꾸벅 졸때쯤이고 형은 이미
꿈나라로 가버린 뒤였다.

내 상상과 공상은 아마도 이때부터 시작된것 같다.

아빠와의 추억

아버지…아빠와의 많은 추억이 있지만..

오늘 문득 생각나는건..어느 초등학교 방학중 개학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때 있었던 일입니다.

밀린 방학숙제를 해결하기위해 개학을 얼마 남기지 않고 수수깡을
사기위해 마침 집에서 쉬고 계시던 아빠와 함께 문방구에 다녀오는
길이었습니다.

집에오는 길이 반쯤 지났을까..

성격급하고 호기심 많던 저는 그 시간을 참지 못하고 수수깡 봉지를
뜯었습니다.

그때 봉지에 박혀있던 호치키스 핀이 손가락에 그만 박혀버렸습니다.
지금 생각하면그렇게 큰 부상은 아니지만(후에 저희 형제는 너무나
많이 다쳐서 부모님 걱정을 많이 시켜드렸습니다..특히 형–;)
아빠는 크게 놀라시며 피를 뚝뚝 흘리는 제 손가락을 입에 가져가셨습니다.
피를 빠는(–;;) 아빠를 보며 내심 속으로 놀란건 아빠의 입속이 정말
따뜻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 어린 나이에 느껴지는 아버지라는
존재감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독이 있을지도 몰라서 였다는 아빠의 설명을 들으며 글썽이던 눈물은
쏙 들어갔지만 아빠의 걱정스런 눈빛과 따뜻했던 입속이 생각납니다.

언제나 옆에있어 더욱 소흘해 지기 쉬운 가족들..
이지만 서로가 서로의 역할을 인식하고 또 느낀다면..
정말 가족의 따뜻함은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인것 같습니다.

라고 언젠가 아빠 홈페이지에 썼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