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번째 지진 – 地震

오늘 또 지진이 일어났다.
내가 크게 느낀 3번째 지진..

오늘은 발생한 곳 강도 4.
내가 있는곳은 강도 3정도의 지진이었다.

회사에서(32층) 느낀거라 많이 흔들리진 않았지만
이 큰 건물이 흔들린다고 생각하니 무서웠다.

지진이 이런 정도로 자주 나는게 좋은건지..
안나는게 좋은건지 잘 모르겠다.

6日

登ります(のぼります)오릅니다.
泊まります(とまります)묵습니다.
掃除します(そうじします)청소합니다.
洗濯します(せんたくします)빨래합니다.
練習します(れんしゅします)연습합니다.
なります 됩니다.
眠い(ねむい)졸리다.
強い(つよい)강하다.
弱い(よわい)약하다.
調子が いい(ちょうしが いい)상태가 좋다.
調子が 悪い(ちょうしが わるい)상태가 나쁘다.

5日

できます 할 수 있습니다.
洗います(あらいます)씻습니다.
弾きます(ひきます)칩니다,켭니다.
歌います(うたいます)노래합니다.
集めます(あつめます)모읍니다.
捨てます(すてます)버립니다.
換えます(かえます)바꿉니다.
運転します(うんてんします)운전합니다.
予約します(よやくします)예약합니다.
見学します(けんがくします)견학합니다.

4日

覚えます(おぼえます)기억합니다
忘れます(わすれます)잊습니다.
なくします 잃습니다.
出します(だします)냅니다.제출합니다.
払います(はらいます)지불합니다.
返します(かえします)반환합니다.
出かけます(でかけます)나갑니다.
脱ぎます(ぬぎます)벗습니다.
持つて行きます(もつていきます)가지고 갑니다.
持つて来ます(もつてきます)가지고 옵니다.
心配します(しんぱいします)걱정합니다.
残業します(ざんぎょうします)잔업합니다.
出長します(しゅつちょうします)출장갑니다.
飲みます(のみます)마십니다.
入ります(はいります)들어갑니다.

3日

乗ります(のります)탑니다.
降ります(おります)내립니다.
乗り換えます(のりかえます)갈아탑니다.
浴びます(あびます)끼얹습니다.
入れます(いれます)넣습니다.
出します(だします)꺼냅니다.
入ります(はいります)들어갑니다.
出ます(でます)나옵니다.
やめます 그만둡니다.
おします 누릅니다.

시부야 : 澁谷 – かいもの


일본식당

나는 720엔짜리 닭고기와 여름 야채 어쩌고를 먹었는데.
아직도 난 일본 음식이 짜다..

오늘은 그냥 할일도 없이 집에 빈둥거리다가 나와 같이
빈둥거리던 우리팀 사람들과 저녁도 먹을겸 시부야로 향했다.

여기서 저녁을 먹고 도큐핸즈에 가서 내 운동용 기구!를
골랐다.

아령이 생각보다 비싸 나이키 발목 모래주머니를 샀다.
여차하면 아령으로 쓸라고 ㅋㅋ

다음 옷을사러 출발~


마침 세일중이었다.
홍기형만 제대로 쇼핑하고 나는 반바지만 하나 샀다.
사진에는 아무것도 사지않은 징징.


이건 그냥 옷가게 옆의 식당이던가..간판이 이뻐서..

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어제의 지진을 이야기 하며…

역시 시부야엔 인간이 너무 많다.
やっぱり渋谷には人がたくさんいる!

2日

立ちます(たちます)섭니다.
座ります(すわります)앉습니다.
使います(つかいます)사용합니다.
置きます(おきます)놓습니다.
作ります(つくります)만듭니다.
売ります(うります)팝니다.
知ります(しります)압니다.
住みます(すみます)삽니다.
研究します(けんきゅうします)연구합니다.
知っています(しっています)알고 있습니다.
住んでいます(すんでいます)살고 있습니다.

토고시공원 : 戸語越公園


귀차니즘을 극복하고 토고시 공원으로 향했다.
걸어서 15분 정도?

막상 가보니 아담~하고 좋았다.
모기가 좀 있어서 짜증났지만..

우리나라랑 다 똑같은데..오직 이 공원…공원이 차이가 난다.
그 외에 사람들도 차이가 있겠지만..
오늘 의외의 구경을 했다.

‘식장’이라는 안내표시가 있어 공원 안으로 들어가 보니
무슨 행사가 있나보다. 먹거리와 공연을 하고 있었다.

전통의 문화를 주변에서 쉽게 접할수 있는것..부러웠다.
전통이 많이 사라져 버린 우리 나라가 조금 아쉽다.

[#M_ more.. | less.. |

_M#]

스티브잡스의 스탠포드대 졸업축사

I am honored to be with you today at your commencement from one of the finest universities in the world. I never graduated from college. Truth be told, this is the closest I’ve ever gotten to a college graduation.
먼저 세계 최고의 명문으로 꼽히는 이 곳에서 여러분들의 졸업식에 참석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저는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습니다. 솔직히, 태어나서 대학교 졸업식을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것은 처음이네요.

Today I want to tell you three stories from my life. That’s it. No big deal. Just three stories. The first story is about connecting the dots.

오늘, 저는 여러분께 제가 살아오면서 겪었던 세 가지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그게 답니다. 별로 대단한 이야기는 아니구요. 딱 세가지만요 먼저, 인생의 전환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I dropped out of Reed College after the first 6 months, but then stayed around as a drop-in for another 18 months or so before I really quit. So why did I drop out?

전 리드 칼리지에 입학한지 6개월만에 자퇴했습니다. 그래도 일년 반 정도는 도강을 듣다, 정말로 그만뒀습니다. 왜 자퇴했을까요?

She felt very strongly that I should be adopted by college graduates, so everything was all set for me! It started before I was born. My biological mother was a young, unwed college graduate student, and she decided to put me up for adoption. to be adopted at birth by a lawyer and his wife.

그 것은 제가 태어나기 전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제 생모는 대학원생인 젊은 미혼모였습니다. 그래서 저를 입양보내기로 결심했던 거지요. 그녀는 제 미래를 생각해, 대학 정도는 졸업한 교양있는 사람이 양부모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태어나자마자 변호사 가정에 입양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Except that when I popped out they decided at the last minute that they really wanted a girl. So my parents, who were on a waiting list, got a call in the middle of the night asking: “We have an unexpected baby boy; do you want him?”

그들은 여자 아이를 원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들 대신 대기자 명단에 있던 양부모님들은 한 밤 중에 걸려온 전화를 받고 : “어떡하죠? 예정에 없던 사내아이가 태어났는데, 그래도 입양하실 건가요?”

They said: “Of course.”
“물론이죠”

My biological mother later found out that my mother had never graduated from college and that my father had never graduated from high school. She refused to sign the final adoption papers.

그런데 알고보니 양어머니는 대졸자도 아니었고, 양아버지는 고등학교도 졸업못한 사람이어서 친어머니는 입양동의서 쓰기를 거부했습니다.

She only relented a few months later when my parents promised that I would someday go to college. And 17 years later I did go to college.

친어머니는 양부모님들이 저를 꼭 대학까지 보내주겠다고 약속한 후 몇개월이 지나서야 화가 풀렸습니다. 17년후, 저는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But I naively chose a college that was almost as expensive as Stanford, and all of my working-class parents’ savings were being spent on my college tuition.

그러나 저는 멍청하게도 바로 이 곳, 스탠포드의 학비와 맞먹는 값비싼 학교를 선택했습니다^^ 평범한 노동자였던 부모님이 힘들게 모아뒀던 돈이 모두 제 학비로 들어갔습니다.

After six months, I couldn’t see the value in it. I had no idea what I wanted to do with my life and no idea how college was going to help me figure it out.

결국 6개월 후, 저는 대학 공부가 그만한 가치가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인생에서 원하는 게 무엇인지, 그리고 대학교육이 그 것에 얼마나 어떻게 도움이 될지 판단할 수 없었습니다.

And here I was spending all of the money my parents had saved their entire life. So I decided to drop out and trust that it would all work out OK.

게다가 양부모님들이 평생토록 모은 재산이 전부 제 학비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다 잘 될거라 믿고 자퇴를 결심했습니다.

It was pretty scary at the time, but looking back it was one of the best decisions I ever made. The minute I dropped out I could stop taking the required classes that didn’t interest me, and begin dropping in on the ones that looked interesting.

당시에는 두려웠지만, 뒤돌아 보았을때 제 인생 최고의 결정 중 하나였던 것 같습니다. 자퇴한 순간, 흥미없던 필수과목들을 듣는 것은 그만두고 관심있는 강의만 들을 수 있었습니다.

It wasn’t all romantic. I didn’t have a dorm room, so I slept on the floor in friends’ rooms, I returned coke bottles for the 5¢ deposits to buy food with, and I would walk the 7 miles across town every Sunday night to get one good meal a week at the Hare Krishna temple.

그렇다고 꼭 낭만적인 것만도 아니었습니다. 전 기숙사에 머물 수 없었기 때문에 친구 집 마룻바닥에 자기도 했고 한 병당 5센트씩하는 코카콜라 빈병을 팔아서 먹을 것을 사기도 했습니다. 또 매주 일요일, 단 한번이라도 제대로 된 음식을 먹기 위해 7마일이나 걸어서 하레 크리슈나 사원의 예배에 참석하기도 했습니다.

I loved it. And much of what I stumbled into by following my curiosity and intuition turned out to be priceless later on. Let me give you one example:

맛있더군요^^ 당시 순전히 호기와 직감만을 믿고 저지른 일들이 후에 정말 값진 경험이 됐습니다. 예를 든다면

Reed College at that time offered perhaps the best calligraphy instruction in the country. Throughout the campus every poster, every label on every drawer, was beautifully hand calligraphed.

그 당시 리드 칼리지는 아마 미국 최고의 서체 교육을 제공했던 것 같습니다. 학교 곳곳에 붙어있는 포스터, 서랍에 붙어있는 상표들은 너무 아름다웠구요.

Because I had dropped out and didn’t have to take the normal classes, I decided to take a calligraphy class to learn how to do this.

어차피 자퇴한 상황이라, 정규 과목을 들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서체에 대해서 배워보기로 마음먹고 서체 수업을 들었습니다.

I learned about serif and san serif typefaces, about varying the amount of space between different letter combinations, about what makes great typography great. It was beautiful, historical, artistically subtle in a way that science can’t capture, and I found it fascinating.

그 때 저는 세리프와 산 세리프체를, 다른 글씨의 조합간의 그 여백의 다양함을, 무엇이 위대한 타이포그래피를 위대하게 만드는 지를 배웠습니다. 그것은 ‘과학적’인 방식으로는 따라하기 힘든 아름답고, 유서깊고, 예술적으로 미묘한 것이었고, 전 매료되었습니다.

None of this had even a hope of any practical application in my life. But ten years later, when we were designing the first Macintosh computer, it all came back to me.

이런 것들 중 어느 하나라도 제 인생에 실질적인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10년 후 우리가 첫번째 매킨토시를 구상할 때, 그 것들은 고스란히 빛을 발했습니다.

And we designed it all into the Mac. It was the first computer with beautiful typography. If I had never dropped in on that single course in college, the Mac would have never had multiple typefaces or proportionally spaced fonts. And since Windows just copied the Mac, its likely that no personal computer would have them.

우리가 설계한 매킨토시에 그 기능을 모두 집어넣었으니까요. 그것은 아름다운 서체를 가진 최초의 컴퓨터였습니다. 만약 제가 그 서체 수업을 듣지 않았다면 매킨토시의 복수서체 기능이나 자동 자간 맞춤 기능은 없었을 것이고 맥을 따라한 윈도우도 그런 기능이 없었을 것이고, 결국 개인용 컴퓨터에는 이런 기능이 탑재될 수 없었을 겁니다.

If I had never dropped out, I would have never dropped in on this calligraphy class, and personal computers might not have the wonderful typography that they do.

만약 학교를 자퇴하지 않았다면, 서체 수업을 듣지 못했을 것이고 결국 개인용 컴퓨터가 오늘날처럼 뛰어난 글씨체들을 가질 수도 없었을 겁니다.

Of course it was impossible to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when I was in college.

물론 제가 대학에 있을 때는 그 순간들이 내 인생의 전환점이라는 것을 알아챌 수 없었습니다.

But it was very, very clear looking backwards ten years later.
그러나 1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모든 것이 분명하게 보입니다.

Again, you can’t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you can only connect them looking backwards.
달리 말하자면, 지금 여러분은 미래를 알 수 없습니다 : 다만 현재와 과거의 사건들만을 연관시켜 볼 수 있을 뿐이죠.

So you have to trust that the dots will somehow connect in your future.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현재의 순간들이 미래에 어떤식으로든지 연결된다는 걸 알아야만 합니다.

You have to trust in something – your gut, destiny, life, karma, whatever.
여러분들은 자신의 배짱, 운명, 인생, 카르마(업) 등 무엇이든지 간에 ‘그 무엇’에 믿음을 가져야만 합니다.

This approach has never let me down, and it has made all the difference in my life.
이런 믿음이 저를 실망시킨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제 인생에서 남들과는 다른 모든 ‘차이’들을 만들어냈습니다.

My second story is about love and loss.
두번째는 사랑과 상실입니다.

I was lucky I found what I loved to do early in life.
저는 운 좋게도 인생에서 정말 하고싶은 일을 일찍 발견했습니다.

Woz and I started Apple in my parents garage when I was 20.
제가 20살 때, 부모님의 차고에서 워즈(스티브 워즈니악)와 함께 애플의 역사가 시작됐습니다.

We worked hard, and in 10 years Apple had grown from just the two of us in a garage into a $2 billion company with over 4000 employees.
우리는 열심히 일해서, 차고에서 2명으로 시작한 애플은 10년 후에 4000명의 종업원을 거느린 2백억달러짜리 기업이 되었습니다.

We had just released our finest creation – the Macintosh – a year earlier, and I had just turned 30. And then I got fired.
제 나이 29살, 우리는 최고의 작품인 매킨토시를 출시했습니다. 그러나 이듬해 저는 해고당했습니다.

How can you get fired from a company you started?
내가 세운 회사에서 내가 해고 당하다니!

Well, as Apple grew we hired someone who I thought was very talented to run the company with me,
당시, 애플이 점점 성장하면서, 저는 저와 함께 회사를 경영할 유능한 경영자를 데려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and for the first year or so things went well.
처음 1년정도는 그런대로 잘 돌아갔습니다.

But then our visions of the future began to diverge and eventually we had a falling out.
그런데 언젠가부터 우리의 비전은 서로 어긋나기 시작했고, 결국 우리 둘의 사이도 어긋나기 시작했습니다.

When we did, our Board of Directors sided with him. So at 30 I was out. And very publicly out.
이 때, 우리 회사의 경영진들은 존 스컬리의 편을 들었고, 저는 30살에 쫓겨나야만 했습니다. 그 것도 아주 공공연하게.

What had been the focus of my entire adult life was gone, and it was devastating.
저는 인생의 촛점을 잃어버렸고, 뭐라 말할 수 없는 참담한 심정이었습니다.

I really didn’t know what to do for a few months.
전 정말 말 그대로, 몇 개월 동안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답니다.

I felt that I had let the previous generation of entrepreneurs down – that I had dropped the baton as it was being passed to me.
마치 달리기 계주에서 바톤을 놓친 선수처럼, 선배 벤처기업인들에게 송구스런 마음이 들었고

I met with David Packard and Bob Noyce and tried to apologize for screwing up so badly.
데이비드 패커드(HP의 공동 창업자)와 밥 노이스(인텔 공동 창업자)를 만나 이렇게 실패한 것에 대해 사과하려했습니다.

I was a very public failure, and I even thought about running away from the valley.
저는 완전히 ‘공공의 실패작’으로 전락했고, 실리콘 밸리에서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But something slowly began to dawn on me.
그러나 제 맘 속에는 뭔가가 천천히 다시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I still loved what I did. The turn of events at Apple had not changed that one bit.
전 여전히 제가 했던 일을 사랑했고, 애플에서 겪었던 일들조차도 그런 마음들을 꺾지 못했습니다.

I had been rejected, but I was still in love. And so I decided to start over.
전 해고당했지만, 여전히 일에 대한 사랑은 식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전 다시 시작하기로 결심했습니다.

I didn’t see it then, but it turned out that getting fired from Apple was the best thing that could have ever happened to me.
당시에는 몰랐지만, 애플에서 해고당한 것은 제 인생 최고의 사건임을 깨닫게 됐습니다.

The heaviness of being successful was replaced by the lightness of being a beginner again, less sure about everything.
그 사건으로 인해 저는 성공이란 중압감에서 벗어나서 초심자의 마음으로 돌아가

It freed me to enter one of the most creative periods of my life.
자유를 만끽하며, 내 인생의 최고의 창의력을 발휘하는 시기로 갈 수 있게 됐습니다.

During the next five years, I started a company named NeXT, another company named Pixar,and fell in love with an amazing woman who would become my wife.
이후 5년동안 저는 ‘넥스트’, ‘픽사’를 만들고, 그리고 지금 제 아내가 되어준 그녀와 사랑에 빠져버렸습니다.

Pixar went on to create the worlds first computer animated feature film, Toy Story, and is now the most successful animation studio in the world.
픽사는 세계 최초의 3D 애니메이션 토이 스토리를 시작으로, 지금은 가장 성공한 애니메이션 제작사가 되었습니다.

In a remarkable turn of events, Apple bought NeXT, I retuned to Apple, and the technology we developed at NeXT is at the heart of Apple’s current renaissance.
세기의 사건으로 평가되는 애플의 넥스트 인수와 저의 애플로 복귀 후, 넥스트 시절 개발했던 기술들은 현재 애플의 르네상스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And Laurene and I have a wonderful family together.
또한 로렌과 저는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습니다.

I’m pretty sure none of this would have happened if I hadn’t been fired from Apple.
애플에서 해고당하지 않았다면, 이런 기쁜 일들중 어떤 한가지도 겪을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It was awful tasting medicine, but I guess the patient needed it.
정말 독하고 쓰디 쓴 약이었지만, 이게 필요한 환자도 있는가봅니다.

Sometimes life hits you in the head with a brick. Don’t lose faith.
때로 인생이 당신의 뒷통수를 때리더라도, 결코 믿음을 잃지 마십시오.

I’m convinced that the only thing that kept me going was that I loved what I did.
전 반드시 인생에서 해야할, 제가 사랑하는 일이 있었기에, 반드시 이겨낸다고 확신했습니다.

You’ve got to find what you love. And that is as true for your work as it is for your lovers.
당신이 사랑하는 것을 찾아보세요. 사랑하는 사람이 내게 먼저 다가오지 않듯, 일도 그런 것이죠.

Your work is going to fill a large part of your life,
‘노동’은 인생의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and the only way to be truly satisfied is to do what you believe is great work.
그런 거대한 시간 속에서 진정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방법은 스스로가 위대한 일을 한다고 자부하는 것입니다.

And the only way to do great work is to love what you do.
자신의 일을 위대하다고 자부할 수 있을 때는, 사랑하는 일을 하고있는 그 순간 뿐입니다.

If you haven’t found it yet, keep looking. Don’t settle. As with all matters of the heart, you’ll know when you find it.
지금도 찾지 못했거나, 잘 모르겠다해도 주저앉지 말고 포기하지 마세요. 전심을 다하면 반드시 찾을 수 있습니다.

And, like any great relationship, it just gets better and better as the years roll on.
일단 한 번 찾아낸다면, 서로 사랑하는 연인들처럼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욱 더 깊어질 것입니다.
So keep looking until you find it. Don’t settle.
그러니 그 것들을 찾아낼 때까지 포기하지 마세요. 현실에 주저앉지 마세요

My third story is about death.
세번째는 죽음에 관한 것입니다.

When I was 17, I read a quote that went something like:
17살 때, 이런 경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If you live each day as if it was your last, someday you’ll most certainly be right.”
하루 하루를 인생의 마지막 날처럼 산다면, 언젠가는 바른 길에 서 있을 것이다

It made an impression on me, and since then, for the past 33 years! ,
이 글에 감명받은 저는 그 후 50살이 되도록

I have looked in the mirror every morning and asked myself:
매일아침 거울을 보면서 자신에게 묻곤 했습니다.

“If today were the last day of my life, would I want to do what I am about to do today?”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지금 하려고 하는 일을 할 것인가?

And whenever the answer has been “No” for too many days in a row, I know I need to change something.
아니오!라는 답이 계속 나온다면, 다른 것을 해야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Remembering that I’ll be dead soon is the most important tool I’ve ever encountered to help me make the big choices in life.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명심하는 것이 저에게는 가장 중요한 도구가 됩니다.

Because almost everything ?
왜냐구요?

all external expectations, all pride, all fear of embarrassment or failure –
외부의 기대, 각종 자부심과 자만심. 수치스러움와 실패에 대한 두려움들은

these things just fall away in the face of death, leaving only what is truly important.
‘죽음’ 을 직면해서는 모두 떨어져나가고, 오직 진실로 중요한 것들 만이 남기 때문입니다.

Remembering that you are going to die is the best way I know to avoid the trap of thinking you have something to lose.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무엇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최고의 길입니다.

You are already naked. There is no reason not to follow your heart.
여러분들이 지금 모두 잃어버린 상태라면, 더이상 잃을 것도 없기에 본능에 충실할 수 밖에 없습니다.

About a year ago I was diagnosed with cancer.
저는 1년 전쯤 암진단을 받았습니다.

I had a scan at 7:30 in the morning, and it clearly showed a tumor on my pancreas.
아침 7시 반에 검사를 받았는데, 이미 췌장에 종양이 있었습니다.

I didn’t even know what a pancreas was.
그전까지는 췌장이란 게 뭔지도 몰랐는데요.

The doctors told me this was almost certainly a type of cancer that is incurable, and that I should expect to live no longer than three to six months.
의사들은 길어야 3개월에서 6개월이라고 말했습니다.

My doctor advised me to go home and get my affairs in order, which is doctor’s code for prepare to die.
주치의는 집으로 돌아가 신변정리를 하라고 했습니다. 죽음을 준비하라는 뜻이었죠.

It means to try to tell your kids everything you thought you’d have the next 10 years to tell them in just a few months.
그 것은 내 아이들에게 10년동안 해줄수 있는 것을 단 몇달안에 다 해치워야된단 말이었고

It means to make sure everything is buttoned up so that it will be as easy as possible for your family.
임종 시에 사람들이 받을 충격이 덜하도록 매사를 정리하란 말이었고

It means to say your goodbyes.
작별인사를 준비하라는 말이었습니다.

I lived with that diagnosis all day.
전 불치병 판정을 받았습니다.

Later that evening I had a biopsy, where they stuck an endoscope down my throat,
through my stomach and into my intestines, put a needle into my pancreas and got a few cells from the tumor.
그 날 저녁 위장을 지나 장까지 내시경을 넣어서 암세포를 채취해 조직검사를 받았습니다.

I was sedated, but my wife, who was there, told me that when they viewed the cells under a microscope
저는 마취상태였는데, 후에 아내가 말해주길, 현미경으로 세포를 분석한 결과

the doctors started crying because it turned out to be a very rare form of pancreatic cancer that is curable with surgery.
치료가 가능한 아주 희귀한 췌장암으로써, 의사들까지도 기뻐서 눈물을 글썽였다고 합니다.

I had the surgery and I’m fine now.
저는 수술을 받았고, 지금은 괜찮습니다.

This was the closest I’ve been to facing death, and I hope its the closest I get for a few more decades.
그 때만큼 제가 죽음에 가까이 가 본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또한 앞으로도 수십년간은 그렇게 가까이 가고 싶지 않습니다^^

Having lived through it, I can now say this to you with a bit more certainty than when death was a useful but purely intellectual concept:
이런 경험을 해보니, ‘죽음’이 때론 유용하단 것을 머리로만 알고 있을 때보다 더 정확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No one wants to die. Even people who want to go to heaven don’t want to die to get there.
아무도 죽길 원하지 않습니다. 천국에 가고싶다는 사람들조차도 그곳에 가기위해 죽고 싶어하지는 않죠.

And yet death is the destination we all share. No one has ever escaped it.
그리고 여전히 죽음은 우리모두의 숙명입니다. 아무도 피할 수 없죠.

And that is as it should be, because Death is very likely the single best invention of Life.
그리고 그래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삶이 만든 최고의 발명이 ‘죽음’이니까요.

It is Life’s change agent. It clears out the old to make way for the new.
죽음은 ‘인생들’을 변화시킵니다. 죽음은 새로운 것이 헌 것을 대체할 수 있도록 만들어줍니다.

Right now the new is you, but someday not too long from now, you will gradually become the old and be cleared away.
지금의 여러분들은 그 중에 ‘새로움’이란 자리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 머지 않은때에 여러분들도 새로운 세대들에게 그 자리를 물려줘야할 것입니다.

Sorry to be so dramatic, but it is quite true.
너무 극적으로 들렸다면 죄송하지만, 사실이 그렇습니다.

Your time is limited, so don’t waste it living someone else’s life.
여러분들의 삶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낭비하지 마십쇼.

Don’t be trapped by dogma – which is living with the results of other people’s thinking.
도그마-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 얽매이지 마십쇼

Don’t let the noise of other’s opinions drown out your own inner voice.
타인의 소리들이 여러분들 내면의 진정한 목소리를 방해하지 못하게 하세요

And most important, have the courage to follow your heart and intuition.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과 영감을 따르는 용기를 가지는 것입니다.

They somehow already know what you truly want to become. Everything else is secondary.
이미 마음과 영감은 당신이 진짜로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나머지 것들은 부차적인 것이죠.

When I was young, there was an amazing publication called The Whole Earth Catalog, which was one of the bibles of my generation.
제가 어릴 때, 제 나이 또래라면 다 알만한 ‘지구 백과’란 책이 있었습니다.

It was created by a fellow named Stewart Brand not far from here in Menlo Park, and he brought it to life with his poetic touch.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먼로 파크에 사는 스튜어트 브랜드란 사람이 쓴 책인데, 자신의 모든 걸 불어넣은 책이었지요.

This was in the late 1960’s, before personal computers and desktop publishing, so it was all made with typewriters, scissors, and polaroid cameras.
PC나 전자출판이 존재하기 전인 1960년대 후반이었기 때문에, 타자기, 가위, 폴라노이드로 그 책을 만들었습니다.

It was sort of like Google in paperback form, 35 years before Google came along:
35년 전의 책으로 된 구글이라고나 할까요.

it was idealistic, and overflowing with neat tools and great notions.
그 책은 위대한 의지와 아주 간단한 도구만으로 만들어진 역작이었습니다.

Stewart and his team put out several issues of The Whole Earth Catalog, and then when it had run its course, they put out a final issue.
스튜어트와 친구들은 몇 번의 개정판을 내놓았고, 수명이 다할 때쯤엔 최종판을 내놓았습니다.

It was the mid-1970s, and I was your age.
그 때가 70년대 중반, 제가 여러분 나이 때였죠.

On the back cover of their final issue was a photograph of an early morning country road,
최종판의 뒤쪽 표지에는 이른 아침 시골길 사진이 있었는데,

the kind you might find yourself hitchhiking on if you were so adventurous.
아마 모험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히치하이킹을 하고싶다는 생각이 들정도였지요.

Beneath it were the words: “Stay Hungry. Stay Foolish.”
그 사진 밑에는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 배고픔과 함께, 미련함과 함께

It was their farewell message as they signed off. Stay Hungry. Stay Foolish.
배고픔과 함께, 미련함과 함께. 그 것이 그들의 마지막 작별인사였습니다.

And I have always wished that for myself. And now, as you graduate to begin anew, I wish that for you.
저는 이제 새로운 시작을 앞둔 여러분들이 여러분의 분야에서 이런 방법으로 가길 원합니다.

Stay Hungry. Stay Foolish.
배고픔과 함께. 미련함과 함께

Thank you all very much.
감사합니다.

(This is the text of the Commencement address by Steve Jobs, CEO of Apple Computer and of Pixar Animation Studios, delivered on June 12, 2005.)

http://ipost9.com/tt/index.php?pl=54

얼마전 죽음의 문턱에 있었다.
나에게도 조금은 전환점이 될만한 사건들이..
25살 이후에 많이 일어나고 있다.
그 전에는 정해진 삶을 ‘살아갈’ 뿐이었다.
내가 만드는 삶을 살고 싶다.
내가 주인이 되는 인생을 살고싶다.
다른 한편으로는 누군가 다 정해주는 삶을 살고 싶다.

누군가 다 정해주는 삶을 살면 좋지 않다는걸. 빨리
느끼고 버려야 겠다.

아시아나 비행기 엔진고장..

7월 19일 오전 10시.

인천에서 정은이의 배웅을 받고 출국심사 후 10시 나리타행 아시아나 비행기에 올랐다.(OZ102)
출발할 때가 되니 기장의 안내방송이 들려왔다.

수리 문제로 30분 정도 출발이 지연되겠다는 내용이었다.
어떤 문제길래 30분 동안 점검을 한다는 건지.. 이런 여객기들은 언제나 최상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매일 정비하고 하는 거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30분에 지나고 별다른 일 없이 활주로에 진입했다.
이륙하기 위해 속도를 올리고 이륙한다…싶었는데..뭔가 덜컹 걸리는 소리와 진동이 느껴진다.

아..활주로가 평평하지 않나…하는 생각을 할 때 비행기가 이륙했는데…
분명 이륙을 했는데 쿵 쿵 소리와 진동이 멈추질 않았다.

뒷바퀴만 아직 땅에 붙어있나..?
날개 쪽을 봤더니 날개가 심하게 흔들린다. 그것도 주기적인 쿵!쿵! 소리에 맞춰서.
진동도 함께 느껴지는데 꼭 비행기가 어디서 대포를 맞으면 그렇게 흔들릴 거 같다.

날개 쪽을 유심히 관찰한 결과 봐서는 안될 것을 보고 말았다.
바로 엔진이 흔들리는 것이었다.

이런 제길.. 비행기는 이미 하늘에 있고 엔진에서는 약 1.5초 간격으로 쿵! 쿵! 소리와 함께
심하게 떨린다. 아니..휘청휘청 한다고 해야 할까?
이 소리와 진동을 느끼고도 왜 기장은 이륙을 감행하는 거지? 이륙 활주로의 길이가 다시 기수를 내리기에는 너무 역부족인가.. 아니면 4개의 엔진 중 하나는 끄고 일본까지 갈 생각인가…연기인지 구름인지 모를 것들이 날개로 지나간다. 죽겠다는 생각에 뒤에 앉은 승무원을 쳐다봤더니 무전기로 뭔가 심각한 대화를 나누고 있다.

고도도 높았다 낮았다 하고 … 죽겠다 싶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 쿵!쿵!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되었다.
헉..이게 정상적인 모습인가? 뭔가 분명 문제가 있는 거 같은데..
승무원들의 표정에서 더 이상 불안함을 찾을 수 없다.

음..내가 오버한건가..

약 20분 후 기장은 항공기 수리를 위해 다시 인천공항에 착륙하겠다는 방송을 한다.
역시…이건 큰 문제다. 더 무서웠던건 기장의 안내방송이 어리버리했다는거다. 그만큼 비상이란 말인가??

뒤에 이어지는 일본어 방송에는 엔진에 문제가 있다는 말이 들렸다. 제길..왜 한국말로는 이따가 알려드리겠습니다 라는 애매한 방송을 하냔말이다..

구름을 헤치고 다시 인천공항으로 향하게 되었다…제발 무사히 착륙만 해라…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엔진에 문제가 확실한데..문제가 있음 폭발하는건 아닌지..비행기는 날개쪽에 가장 많은 연료가 있다고 들었는데 하필 날개옆자리에 앉아서 제일 먼저 죽게 되는건 아닌지..폭발하면 파편에 맞아죽을지 열기에 녹아죽을지 ..운좋게 튕겨져 나가 살아남으면 인천앞바다에 떨어질 때 어떤 포즈로 떨어져야 살아남을 확률이 높을지..안전밸트는 어느 시점에 풀어야 할지..화염이 덮칠 때 손으로 얼굴을 감싸면 손의 피부가 녹아 얼굴에 붙어버리진 않을지..

이런 생각과 함께 식은땀을 줄줄흘리고 있을 때 내 시야에 인천공항이 들어왔다.

아…착륙을 하는구나..제발 아무일 없어야 할텐데…
어..근데 뭔가 이상하다 ..며칠전 귀국할때는 이렇게 멀리 날지 않았는데…
벌써 활주로가 보이는데 왜 더 안내려가지….????

공항위를 비행하다 갑자기 비행기가 기수를 들어 다시 고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무슨 청룡열차 타는 기분이었다..아..착륙에 실패해서 다시 돌아오는건가? 흑흑..

으악! 문제는 바로 이때였다.
한동안 조용하던 쿵!쿵! 소리가 또 들리기 시작한것이다. 고도를 높이려고 출력을 높이니 바로 들려오는 소리.. 진동도 더 쎄다.. 이제 사람들은 불안해 하기 시작한다..

쿵!

비행기가 흔들린다.. 뒷자리에 앉은 아저씨는 즐기는듯한 함성을 내뱉는다..비명인지..

쿵!

주기적으로 흔들린다..
앞자리에 앉은 여학생들의 얼굴에 걱정이 비춘다..이거 뭐야??? 이런 얼굴이다..

쿵!
미치겠다..제발..제발 이 소리좀 그만 났으면 좋겠다..

쿵쿵…왼쪽 날개쪽에서도 진동이 느껴진다..
헉…..상태는 더 악화되고 있었다..
눈을 감아버렸다..쿵!…쿵!…

속으로 얼마나 빌었을까…다시 소리는 그쳤다..
비행기 상태를 공항 사람들에게 육안으로 확인시켜주기위해 초 저공비행을 한번 했다는 방송이 나왔다..이거 뻥이다…뭔가 문제가 있다…제길 내 목숨이 저자식의 손에 달려있다니 너무 무기력했다..암것도 못해보고 죽나….

다시 수원까지 내려가 비행기를 돌려 두번째 착륙을 시도했다..
이제 비행기 안에 떠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들 같은 생각일 것이다.

무사히 착륙만 하게 해주세요..

유난히 착륙한다는 방송과 안전밸트를 매달라는 방송을 자주 한다. 보통 착륙전에 한번만 하던데…혹시 아까 착륙을 못한게 바퀴에 문제가 있어서 그런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비행이 타기전 사진을 찍는데 정비사가 앞바퀴 덮개를 손으로 밀어서 닫아주는 모습을 얼핏 보았기 때문이다..

아…엔진고장에 랜딩기어까지..역시 죽으려면 악운이 이렇게 와야 하는구나..
비상착륙을 하다가 날개쪽에 충격이 가서 폭발하면 어쩌냐…

고도는 점점 낮아져 간다..
1000피트 170마일..인천공항이 시야에 들어온다..불안하게 흔들리며 고도가 낮아진다..
500..400..300..제발….

드디어 착륙했다..무사히….

아시아나 측에서는 아무런 이유도 설명해주지 않았다.
1시 30분에 다시 출발한다는 말만…

비행기에서 빠져나가면서 물어보니 점검을 해봐야 안단다..
대합실로 빠져나와 비행기를 보니 겉은 멀쩡하다..

많은 사람들이 앞바퀴쪽에 몰려있다..사고는 사고였나 보다..

밥먹으라고 아시아나에서 만원짜리 쿠폰을 줬다..
이번 해프닝 보상의 전부였다.


항의하는 아저씨도 몇몇 보였다..
나도 여러 스캐쥴에서 손해를 보았지만..
살아난것만도 너무나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흑흑

항의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던 이유는 아마도 나처럼 다들 죽다 살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사실 난 고맙기까지 했다..

운명이란 정말 있는걸까? 내가 한줌 재로 공중분해되었다면……….
아무튼 나는 죽다 살아난 경험을 해봤다…
다시는 이런 경험 하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