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cnoc] 기본 포스팅 저장/불러오기

출장 전 1주일 업무처리와 출장 1주일 때문에 2 주간 공백이 있었다. 빨리 배우는 대신 빨리 잊기 때문에 2주는 참 긴 공백… 다행히 가장 복잡한 부분의 구조를 계속 머릿속에서 생각하며 개선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

오늘은 실제 포스팅 저장 시 클래스 -> Json -> File system 으로 저장 한 후, 다시 불러오는 서비스 매니저를 작성했다. 실제 UI 컨트롤러에서는 저장/불러오기만 신경쓰고 인터페이스가 완성 되었으니 나중에 암호화를 하든 로컬 DB에 넣든 클라우드에 보내든 하면 된다.

유니티에 비해 Json 입출력이 조금 번거로웠지만 일단 JsonSerializer 로 사용. Json은 파일로 일단 저장했는데 realm local db에 통으로 넣는것도 좋을것 같다. 완벽을 생각하면 완성을 할 수 없으니 대략 큰 틀만 붙여나가는 형식으로 완성했다.

주로 프로그램 설계를 A4 에 낙서 하듯이 하거나 머릿속에 담아두는데 딜레이가 생기면 바로 잊혀지는 관계로 요즘은 원노트에 간단히 메모하거나 코드 속에 TODO로 할 일을 관리하고 있다. 실제 메타 정보 저장/불러오는 틀이 완성되었으니 앨범에서 가져온 이미지를 복사해서 로컬 저장소에 넣거나 공용저장소에 넣기, 압축, 썸네일 생성 등 이미지처리에 관한 기본 기능을 구현해야 한다.

[nocnoc] Flow 만들기 / DB 스키마

간단한 네비게이션 플로우를 만들었다.

서비스가 실행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구조작업으로, CRUD 기능과 사진 파일 저장 및 리스트 보기, 네비게이션 구조 Route 설정 등에 대한 자료를 공부하고 고민해 보았다. 서비스가 추구하는 방향이 closed, secured 방향이기 때문에 로컬 디비 기반으로 돌아가고 백업과 공유는 optional 로 처리되도록 구조를 잡아야 했다.

보안에 크게 상관없고 편의를 중요하시 하는 유저는 조금 쉬운 백업과 공유가 가능하도록 하고 프론트에서는 두 구조를 구분하지 않고 보여주도록…

실제 구현은 간단한 하단 네비게이션 바에 사진 선택까지, 화면 간 파라매터나 리턴값 가져오는 구조와 해당 데이터를 Json으로 로컬에 입출력하는 부분까지 구현되었다.

다음 목표 실제 이미지 파일저장(압축/리사이즈 포함), 로컬 json 저장/불러오기 및 메모리 이슈없는 무한 그리드 뷰

[nocnoc] 도메인 및 기타 CD 설정 및 로고 디자인

오늘은 개발 보다는 여러 환경 설정과 계정 설정에 시간을 보냈다.

먼저 개발 기간동안 사용할 로고를 디자인 했다. 완벽을 추구하면 1년넘게 로고만 만들고 있을 가능성이 있으니 일단 무조건 완성하는 걸로…

고민의 흔적들..
최종

로고는 최대한 단순하고 서비스 명을 알릴 수 있도록 디자인했다. 아이콘으로서 가독성이 있도록 다른 패턴이나 아이콘은 넣지 않았다. 노크를 표현하려 했지만 너무 복잡해서 포기.

각종 서비스 계정을 설정, 페북은 나중에.

https://www.instagram.com/nocnoc.me/

https://twitter.com/nocnoc_me

도메인 이메일 연결. Yandex 로 하려다 전쟁 때문에 일단 임시로 다음 스마트워크에 연결해 두었다.

in**@no****.me

호스팅 설정은 파이어베이스 호스팅으로. 깃헙에 머지 시 자동 디플로이되도록 설정했다.

www.nocnoc.me / nocnoc.me

그 외 자잘한 파이어베이스 툴들 설정과 자동화 설정을 끝냈다.

이제 개발만 하면 끝?

개발일지를 시작하며 지난 20년을 돌아본다

정말 아이디어만 생각한지 십 수년. 이것저것 시도해 본 게 수 십개. 그 과정에서 얻고 배운건 많지만 유의미한 결과로 나온것이 별로 없다.

2002년 병특으로 시작한 개발경력이 이제 20년차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젠 무엇이 되었든 하나라도 결과물을 만들어 보고자 한다. 늘 생각하는, 소프트웨어 개발자로서, 태생적으로 결과물은 사라지게 되어있지만 그래도 무엇인가 작은 흔적으로 남을 수 있다면 나의 인생에 그리고 이 세상에 조금은 의미를 남길 수 있지 않을까 싶다.

20년동안 나는 어떤 일들을 해 오고 무엇을 배웠을까?

어려서 부터 컴퓨터에 관심이 많았고 컴퓨터 학과에 진학했지만 일반 프로그래밍은 약간 지루하고 목표의식을 가지기에 어려운 주제들이 많았다. 이걸 왜 배우고 이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를 구체적으로 생각하기 어려웠고 조금은 시각적인 부분에 집착하는 나로서는 딱히 흥미를 가지지 못했다. 마치 중고등학교 때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 모르고 하는 것처럼… 그 당시(1999년)개인 웹사이트 만들기 붐이 시작되었던 시점인데, 나 또한 조금 더 시각적인 웹사이트 제작에 끌렸지만 프로그래밍의 재미를 느끼기엔 한계가 있었다.

괜찮은 디자인 템플릿이나 자바스크립트로 된 인터렉티브한 메뉴(그래봐야 별 쏟아지고 버튼 색 바뀌는 정도)를 찾아보다 마주치게 된 플래시(당시 매크로미디어 플래시)가 나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자바스크립트와 유사한 레벨의 스크립트, 통합된 개발 환경, 가벼운 결과물과 웹에서 쉽게 보이고 상호작용 할 수 있는 범용성 등 기존 프로그래밍 언어로 무언가를 할 때 장애가 되었던 모든 것들이 간단하게 정리되어 있는 기분이었다.

성인이 되고 처음으로 무엇인가 관심있는 분야를 가지게 되었고 플래시로 만들 수 있는건 무엇이든 만들기 시작했다. 개인 홈페이지, 게시판, 그림판, 학교 발표 등등.. 무엇보다 만들자 마자 배포하고 주변의 피드백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매력이었다.

2002년 월드컵이 끝나고 병특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제일 처음 했던 업무는 공장 자동화… 70년대 c 로 만들어진 프로그램의 하드웨어(프로그램은 손대면 안됨)를 유지보수하고, 해당 로직을 파악해서 공장자동화 솔루션으로 다시 개발하는 것이 주 업무였다. 델파이나 시중에 나와있는 자기만의 스크립트 언어를 가진 솔루션을 사용해야 했는데 개발 자체도 어렵지만 해당 공정을 파악하기 어려워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결국 코딩 스킬위에 도메인 지식이 우선해야 한다는 단순한 논리를 배울 수 있었다. 그 와중에도 플래시를 UI 로 사용해 보려고 한다던가 하는 시도를 했는데 마지막으로 했던 업무가 회사에서 신규 프로토 프로젝트로 만들던 발 지압+조이스틱을 연동한 청기백기 게임이었는데 하드웨어 연동과 게임로직을 C#으로, UI를 플래시로 만들어 개발 비용과 기간을 많이 단축할 수 있었다. 이 곳에서는 DB와 백엔드, 서버/클라이언트등의 개념들에 대해 실무에서 경험해 보고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많았고 공장의 거친 사람들과 수 많은 갑질 클라이언트들을 사회에서 가장 낮은 레벨인 어린 병특 초년생의 신분으로 어떻게 대해야 할 지 배울 수 있었던 것 같다. 쉽게 말하자면 꼰대 접대 스킬이 만랩을 찍었던 시기… 잘 만든 프로그램도 중요하지만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니 사람과의 관계가 모든것을 결정한다는 큰 깨달음을 얻었었다. 유지보수 업무 때문에 기계를 멈춰야 할 때 자기 실적 떨어진다고 면전에서 욕하던 실무자 아저씨들의 마음을 얻어 점심밥까지 얻어먹고 조카 소리듣는 수준의 관계로 바꾸기도 하였다.

2004년 한게임 플래시게임팀으로 이직, 지금의 하이퍼케주얼 장르이자 당시 대 유행이었던 플래시게임을 만들게 되었다. 2008년까지 한게임-네이버에 있고 중간에 휴직 후 학교를 졸업하면서 본격적인 사회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여기서는 당연히 플래시만을 사용했다. 웹의 미래가 플래시에 달려있을것 같던 시절이었다. 작은 게임을 반복적으로 만들며 기획-개발-출시의 사이클을 어려번 경험해 봤다는게 가장 큰 경험이었다. 중간에 1년정도 일본에서 일해본 경험도 좋았고 내가 만든 결과물이 네이버의 첫페이지나 서비스에 나타나는 뿌듯함도 많았다. 팀을 옮겨 UI/UX에 관련된 개발을 했던것도 지금 생각하면 아주 바람직한 경험이었다.

이런 욕구가 충족되면서 내 기대는 일반적인 사회 생활에 대한 것으로 옮겨갔다. 더 높은 연봉과 더 많은 책임을 가지고 싶었다. 내 기대가 너무 컸던 것일까 아니면 빠르게 성장하는 조직에서 내 역할이 없었던 것일까? 지금 생각하면 간단히 답이 나오는 문제이지만 그 때는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많이 혼란스러워 하고 힘들어 했던것 같다. 사람을 잘 믿고 아직은 어려서 온갖 희망고문에 조리돌림 당하던 때, 더 이상 이용당하고 싶지 않다고 결정하고 다른 기회들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플래시가 대한민국에서 정점에 달해있던 때라 여러 알바도 쉽게 얻고 강의에 번역에 회사 일 말고 다른 활동들을 활발하게 하다보니 회사에서 연봉올리는 것보다 돈이나 경력에서 훨씬 좋다는 것을 알게되고 다른 사람들은 이미 이렇게 살 고 있다는 것에 또 충격을 받는다.

결국 큰 프로젝트를 받아 2008년 법인으로 창업, 정말 안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수 많은 일을 했다. 개발도 개발이지만 대표로서 개발 이외의 모든 일들을 처리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 대하고 만나는걸 좋아했고 스스로의 회사를 키운다는 즐거움이 있어서 번아웃 없이 꾸준히 달릴 수 있었다. 말 한마디에 수천만원씩 왔다갔다하는 계약의 순간이라던가 개발 이외의 많은 요소들이 나의 삶에 미치는 영향력을 다시금 확인하며 매트릭스의 진실의 약을 먹은 사람처럼 다시는 직장인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업(?)은 잘 되었지만 외주업무만을 주로하고 우리의 사업이 없었던 때라 이 때 부터 뭔가를 해야한다는 강박이 생겼던것 같다. 수 많은 아이디어 회의와 프로토 개발 그리고 실제 구현과 실패를 경험하며 리더쉽의 부재, 소통의 아쉬움 등의 여러 문제를 알게되고 또 해결하고자 했지만 눈 앞에 들어오는 다른 계약들을 무시할 수 없어서 우리들의 프로젝트는 자주 중단되고 바뀌었다. 2011년 즈음 이러한 상황이 반복되고 번아웃이 올 때 즈음 회사를 정리하게 된다. 무엇을 하겠다는 확실한 동기가 없이 브레인스토밍만 하는것 보다 무엇을 하겠다는 생각이 구체적으로 생기면 다시 시작하겠다는 마음이었다. 08년 창업후 첫째, 10년에 둘째가 태어나서 이전처럼 밤샘하고 미친듯이 일을 할 상황이 안되었던 것도 이유였다.

법인은 유지하고 있었기에 들어오는 일들은 혼자 처리하고 무슨 사업을 할 지, 어떤 서비스를 만들지 고민하는게 일과였다. 일하면서 만난 많은 사람들을 다시 만나며 팀을 꾸려보기도 하고 정기적으로 아이디어 회의도 해 보고 그 와중에 외주 업무와 셋째 임신 그리고 고민과 고민과 고민… 2012년 카카오 게임의 성공에 자극받아 퍼즐장르의 게임을 처음으로 만들어 앱스토어와 플레이 스토어에 출시했다. 마케팅에 대한 개념이 없는 상태라 출시 후 다운로드 자체가 되지 않았고 예상하지 못했던 많은 사이드 업무들로 게임 출시 후 ‘좋은 경험했다’ 정도의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외주 아티스트와의 협업, 코어 게임 플레이 외에 생각해야 할 수 많은 변수들, 스토어 페이지, 홍보 등 개인이 하기에 부족한 많은 점들을 다시금 확인하며 또 다시 외주와 번역…

당시 전세로 살던 전원주택이 살기가 어려워질 정도로 하자가 많고 악화되자 이걸 계기로 늘 이야기만 해 왔던 해외 이민(당시엔 한 번 살아보자 정도…)을 결심, 급히 모든 걸 처분하고 2014년 한국을 떠나게 된다. 내 머릿속의 계획은 게임을 몇 개 더 만들어서 돈을 벌거나 그게 안되면 만들어 놓은 게임을 포트폴리오로 어딘가에 취직을 한다는 것. 말레이시아, 발리 여행 중에 비슷한 장르의 게임 2개를 완성해서 내 놓았지만 역시 반응은 좋지 않았다. 첫 번째 게임과 비슷하게 홍보가 전혀 되지 않았고 이런 부분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전혀 모르던 때였다.

2014년 6월, 독일에 들어온 상황에서 현실적으로 비자 받기가 어려워 취업을 결심, 언리얼 엔진으로 콘솔 게임을 만드는 회사에 플래시를 이용해 UI를 만드는 포지션으로 입사하게 된다. 스케일폼이라는 프레임워크가 플래시를 언리얼 엔진에서 돌게 해주는데 엔진이 발전하는 것에 비해 플래시는 너무 느렸다. 결국 플래시 개발자로 채용되었으니 스스로 팀에 새롭게 UI를 만들것을 제안해 큰 성과를 내게 되었다. 언리얼 엔진과 C++로 성능과 디자인 효과에 큰 성과를 냈고, 이 변화와 도전으로 회사와 동료들에게 큰 신뢰를 얻게 되었으나 퍼블리셔의 프로젝트 취소로 이직을 하게 되었다. 이 곳에서는 언리얼엔진에 대해 많이 배우게 되었고 100명 이상의 큰 팀이 어떻게 하나의 프로젝트에 협업하는지, 수평조직 문화가 어떤것인지에 대해서도 많이 배우게 되었다.

2015년 9월, 독일에서 두 번째 회사는 모바일로 플래시 게임을 하는 업무였는데 이 회사는 조직 개발과 눈에 보이는 외형 확장에 돈을 아끼지 않던 미국 발 스타트업이었다. 내가 들어갈때 한창 확장하던 시기였고 제대로 된 에자일 개발을 하고자 각 팀 구성을 정석대로 꾸려놓고 정석대로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었다. 마치 투자자 돈으로 에자일 코칭을 받는 기분으로.. 덕분에 에자일 개발론에 대해 피부로 느끼며 배울 수 있었다. 또한 슬쩍슬쩍 손만 대 보던 유니티 개발도 시작하게되었다. 리드 엔지니어로서 역할을 시작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방만한 운영으로 모회사가 매각을 결정하면서 당시 인수를 희망했지만 실패한 한국 회사가 베를린 지사를 만드는 데 합류하게 된다.

2017년 2월, 리드 엔지니어로 유니티 모바일 게임을 만드는 팀을 꾸리는 것이 주요 미션이었지만 한국 본사의 의사결정과 정치질 때문에 무엇하나 되는 것 없었던 시간이었다. 주로 외주 개발 업체를 관리하고 유니티로 프로토타이핑을 했는데 실력있는 외주 업체 CTO와 함께 한 프로젝트를 출시까지 할 수 있었다. 목표로 했던 영주권도 취득하여 처음 독일에 왔을 때 취업해야 했던 이유도 사라졌다. 이런 저런 생각으로 마음이 뒤숭숭 할 때 마침(?) 한국에서 갑자기 지사 철수를 발표하게 된다. 정치질이 이유였는데 여러 경험으로 한국 회사와는 일하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계기가 되었다.

다시 나만의 일을 해야하나 조금 쉬어야 하나로 뒤숭숭할 때 잘나가는 스타트업에 들어가 있던 기존 동료가 같이 일해보자는 제안을 했다.하다가 싫으면 언제든 그만두자는 마음으로 2018년 6월에 합류해서 여러 포지션을 두루 거치며 마지막엔 50명 이상의 개발자를 책임지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자율 주행 관련 시뮬레이션을 만드는 회사라 처음엔 클라이언트 쪽 유니티 개발을 했지만 가벼운 뷰어가 있어야 해서 WebGL로 뷰어/에디터를 만들고, NodeJS 로 툴을 만들고 Jenkins 와 도커로 CI/CD 구현을, 그리고 이 모든것을 나 대신 수행할 사람들을 채용했다. 개발팀, QA팀, 릴리즈팀을 만들고 사람을 뽑고 관리하고 개발 업무와 프로젝트 지원 등 회사의 중요한 의사결정에 중요한 포지션으로 일 했기 때문에 꼭 사업이 아니더라도 이 곳에서 같이 성공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희망회로를 돌리던 때였다. 네이버에서 얻은 교훈 때문인지, 대부분 나와 맞지만 내가 특히 싫어하는 일을 해야 하는 상황 때문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어쩐지 나 스스로가 장기판의 말일 뿐이라는 기분이 들면서 처음으로 아무런 계획없이 사직을 하기에 이르렀다. 사직 후 계약에 따라 최소 3달을 더 일해야 했는데 나 스스로가 정신적으로 얼마나 지쳐있었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나 스스로 내보일 수 있는 무엇인가가 없다는게 속상했다. 마침 독일에서 같이 일했던 친구의 소개로 한 창업자와 함께 모바일 앱 프로토 타입을 만들어 투자를 받아보기로 했고, 동시에 같이 일했던 친구와 게임 프로토타입을 만들어 역시 우리만의 게임 회사를 만들어 보자는 계획을 세웠다. 이제야 직장인에서 다시 사업가로 돌아가는 마음으로…

2020년 1월, 모바일 앱 프로토는 만들었지만 코로나로 대부분의 투자 미팅이 취소 되어 프로젝트를 홀드 상태에 들어갔다. 게임 프로젝트는 우리의 지분은 거의 포기하는 대신 전폭적인 지지를 해주는 회사에 들어가서 하는 것으로 결정 되었다. 아직도 안정적인 급여의 미련을 버리지 못해 결국 이 길을 택했다 ㅠㅠ 게임을 만들면서 스스로 프로젝트도 시작한다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곧 프로젝트가 바빠지며 개발과 팀 빌딩에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새 2022년이 되었다.

물론 그 와중에 형이랑 웹지엘로 만드는 게임 프로젝트도 하고 유니티로 게임 프레임워크도 만들어 보았지만 꾸준히 지속되지 못했다. 그렇게 게임만들고 갈팡질팡만 하다 무엇이라도 한 걸을 앞으로 가야겠다고 다짐한게 수 개월 전… 그리고 이제 이렇게 첫 발을 다시 내 딛었다. 프로젝트는 플러터로 만드는 폐쇄형 SNS, 그리고 유니티로 만드는 게임 이렇게 두 가지이다. 하나도 못하는 놈이 왜 두 가지를 동시에 하냐면 하나를 하게 되면 다른 한쪽이 하고 싶어 의욕이 떨어지는 때가 있는데 그 때 주제를 바꿔 진행한다면 조금 효율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테크트리 요약

1992 Turbo C

1999 Java, C++, JS, Flash/AS

2002 Delph, VB, PHP

2003 C#, ASP

2014 UE4/C++

2015 Unity/C#

2018 WebGL/TS

2019 Flutter/Dart

현재 주로 사용하는 기술들 Flutter/Dart, Unity/C#, JS/TS, NodeJS, Electron, Vue, Firebase

애플과 구글 개발자 등록도 새로운 계정으로 했다.

그리고 오늘 첫 일지를 남긴다. 프로젝트명은 nocnoc.me 와 LastHero(가칭)

애플, 구글 개발자 등록

스토어 페이지 세팅 및 각종 certificate/provisioning 설정

깃헙에 프로젝트 등록, 초기 커밋

파이어베이스 프로젝트 세팅

CodeMagic 에 nocnoc CI/CD 연동 및 테스트

nocnoc 기본 flow 디자인

nocnoc 네비게인션 바

학기 끝, 방학 시작

오늘 부로 1학기가 마무리 되고 1주일 간의 겨울방학에 들어갔다. 우리 귀염둥이들도 각자 성적표를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번에 김나지움에 진학해야 하는 호야가 헉헉거리며 집으로 제일 먼저 뛰어왔다. 미리 선생님들한테 물어봐서 대충의 성적은 알고 있었는데 한 과목에서 예상보다 좋은 성적을 받았다며 난리다. 5학년2학기와 6학년1학기 성적을 평균한 점수가 적용되는 김나지움 입시… 마찬가지로 3학년2학기와 4학년 1학기 성적으로 5학년부터 시작하는 김나지움에도 지원했었는데 그 나이의 아이들은 정말 아무 생각이 없기 때문에 우리가 너무 밀어붙이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과 당시 선생님, 친구들이 너무 좋았기에 적극적으로 다른곳들에 지원하지 않았었다. 그 땐 모든 과목 평균이 1점(최고점)이어서 별 생각이 없었는데 이후 코로나 시대와 약간 이른 사춘기인지 호야가 엄청 방황하기 시작했다.

온 가족이 집에 있으면서 우리가 조금 안일하게 생각했던것도 사실이다. 닌텐도를 사서 온 가족이 동물의 숲은 하느라 몇시간씩 서로 게임을 하고, 학교의 원격 수업 초기에 엉망인 프로세스를 보고 금방 다시 학교에 가려니 하고 내버려 둔것이 가장 기본적으로 해야할 것들도 지나치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더구나 약속과 다르게 호야가 있던 반이 사라져 버려서 친구들과 선생님과도 헤어져야 했고 갑자기 바뀐 선생님들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록다운이 끝나고 다시 학교로 가면서 조금씩 마음이 잡히는 듯 하다가도, 이미 공부는 포기한 몇몇 친구들이 집요하게 호야와 놀자고 하고 장난을 거는 통에 학교에서 이것 저것 놓치는게 많았다. 그렇지 않아도 이 동네 김나지움 컷트라인이 높다고 소문이 자자한데 호야는 1점을 맞을 수도 있는 과목을 어이없는 실수나 귀찮음(?)으로 2점을 받아오는 날이 많았다. 길고도 길었던 잔소리와 설득의 시간을 지나 나름 열심히 노력한 결과, 본인이 만족할 만한 점수를 받아서 기뻐하고 안도하는걸 보니 이녀석이 말은 안했지만 속으로 엄청 긴장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누나가 다니는 학교는 입학시험이 따로 있는데 그 시험도 봐 둔 상태고, 시험 결과에 따라 어느 학교를 지원할 지 결정하면 될 것 같다.

호야가 신나서 떠들과 있을 때 시우가 집에 들어왔다. 3학년이 되어 처음으로 점수가 나온 성적표를 받는 시우는 1점 받는게 당연한거 아니냐면서 목에 힘을 잔뜩 주었다. 더구나 자신은 ‘똑똑한 아이’상과 ‘빠른 아이’상, 두 개를 받았다며 반에 상장을 받은 아이는 4명인데 두 명만 두개의 상장을 받았다며 또 자랑이다. 더구나 이번 학기 반장으로 대 활약을 한 터라(더 하고 싶다고 아쉬워 함) 높아진 콧대가 하늘을 찌를 정도…

마지막으로 지우가 2점이 몇개 안된다는 자랑을 하며 들어왔다. 그게 무슨 자랑이냐는 내 농담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저번보다 잘했다며 깔깔거린다. 지우는 최근에 사춘기를 보내며 무슨 바람인지 바이올린과 공부에 굉장히 시간을 쏟더니 어려운 과목들은 모두 1점을 받아왔다.

정말 세 아이 모두 한 달에 10분정도 뭔가 물어보면 대충 알려주는 정도의 신경만 썼는데도 스스로 알아서 모든 것들을 잘 하고 있으니 정말 눈물이 날 만큼 고마웠다. 특히 지우는 우리 입장에서 거의 신경을 쓰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매일 하루하루를 알차고 즐겁게 보내고 있다. 부모로서 여러 잔소리를 하지만 사실 할 필요도 없는 말들에 다른 사람들이 보면 참으로 배부른 소리들일 것이다.

독일이 학업 성취도가 떨어져서 우리 아이들이 그냥 잘하는 걸까? 그런 아닌것 같다. 한국도 장난 아니지만 여기서 잘하기 위해서는 한국과 다른 방향으로 열심히 해야 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노트 정리부터 수업태도, 발표, 쪽지시험, 정규시험 그리고 실습이나 프레젠테이션까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어 하나도 모르고 온 우리 아이들이 이렇게 잘 하고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 더구나 놀기도 엄청 놀면서!

이번 방학이 지나면 호야는 희망 학교에 원서를 쓰고 6월 말이 되어야 결과를 알 수 있다. 이젠 뭐..어떻게든 될것이라 믿고 이제 남은건 시우… 시우는 가능하면 5학년때 김나지움에 보내려고 한다. 지우와 호야 경험상 그룬트슐레에서 5,6학년은 정말 개판인것 같다…

한국의 부모들이 일단 대학만 보내자고 다짐하는 것 처럼, 우리는 일단 김나지움만 보내자고 다짐하고 있다. 김나지움이 대단한건 아니지만 10대의 가장 빛나는 6년을 보내는 곳인 만큼, 그 곳에서 좋은 추억을 가지고 즐겁고 행복하게 지냈으면 하는 바램에서다. 대학? 그건 본인들이 알아서 결정하겠지… 학비가 있는것도 아니고 여느 독일 가정처럼 만 18세 성인이 되어 가능하다면 독립하게 해 주고 싶다. 대학이 아니라 다른 하고 싶은게 있다면 더 좋고.

예민한 호야와 더불어 가슴졸이던 몇 달의 고생이 이제 공식적으로 끝났다. 이 경험으로 아이들도 많이 배웠고 더 성장했음을 느낀다. 무엇보다 다행인건 노력한 만큼 나오는 결과를 아이들 스스로 확인했다는 것이다. 기저귀 찬 막둥이 업고 춥디 추운 독일에 직장도 집도 아무것도 없이 들어온게 7년전인데 아이들이 이렇게 잘 크고 적응해 주어 너무 감사하고 그간의 고생을 보상받는 보람을 느낀다.

사람은

사람은 같은 자리에 머물지 않는다.

그리고

사람은 같은 자리에 머물지 않는다.

한숨

몸이 지쳐서 마음이 지치는건지 운동을 안해서 그런지 원인은 모르겠지만 일도 하기 싫고 짜증이 많이 나는 시기다. 날씨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은데 조금 답답한 마음이 가시지가 않는다.

예전 같으면 맥주 한 잔 마시고 영화도 보고 했을텐데, 맥주를 마시면 속이 안좋고, 보고 싶은 영화도 없어서 이런 재미가 없다. 그래서 결국 내가 하는건 개인 프로젝트 끄적거리는건데 쉬는 시간도 없이 또 일은 한다는 생각에 우울해진다.

일이 취미라니.. 재밌을땐 싫지 않지만 요즘처럼 일 자체가 하기 싫을 땐 그 대안으로 무엇을 해야할지 모르겠다. 요즘 이런 저런 커뮤니티를 기웃거려보면 다들 나보다 여유있고 잘 사는 사람들만 보인다. 딱히 돈을 아끼는건 아니고 그냥 검소한(?)게 생활화 되어있다보니 실제로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든 없든 상관없이 늘 조금 답답하게 살아가고 있는 느낌이다. 돈은 많이 쓰는데 전부 먹을것이고 아이들 한테 들어가는 비용이다.

개발에 관한 모든 비용은 회사에서 추가로 나오고, 장비든 뭐든 더 받을 수도 있지만 딱히 더 이상 필요하다고 느끼지 않는다. 그러면서 애플 개발자 등록 1년에 100유로 짜리는 계속 미루고 있고.. 물론 딱히 지금 등록할 필요는 없지만 한다면 조금 더 동기부여가 될 것 같은데 하면서…이게 돈을 아낄려고 하는건가?

그런 마음에 ‘에라이!’ 하면서 돈 쓸 핑계를 이리 저리 만들어 보다가도 결국 제자리로 돌아오고야 만다. 상상속에선 전기차도 사고 애들 스마트폰도 사주고 컴퓨터도 하나씩 사주고선, 돈도 써본놈이 쓴다는데…언제 그렇게 써 볼 수 있을까? 집에 들어가는 돈도 가계부를 쓸 필요가 없을 정도로 살고 있는데 정말 ‘나’한테 들어가는 돈이 매달 어느정도 되는지 궁금하다. 아마 난 지금 연봉의 반만 받아도 지금과 똑같이 살 수 있겠지.. 나 혼자라면 1/10?

그럼 이 답답한 마음의 정체는 무엇일까..? 더 성공해야한다는 막연한 목표… 나와 가족이 경제적으로 걱정없이 살 수 있을 어떤?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책임감… 내가 하고싶은게 뭔지 모르겠다는 막연함 들이 모여서 조금씩 나를 답답하게 만드는게 아닐까? 나만의 공간이 필요한건지 시간이 필요한건지도 모르겠다. 내일 부터는 혼자서라도 꼭 산책을 해야지…

날씨가 좋아지면 정원 관리를 하면서 마음도 다스릴 수 있을텐데… 결국은 날씨 탓이네.

2021 그리고 2022

바쁘다면 바쁘고 단조롭다면 단조롭게 흘러간 2021년인것 같다. 오늘은 2021년의 마지막 날.. 여느 때와 같은 10대 뉴스는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가족과 나의 지난 한 해를 돌아보는 기록을 적어보려 한다.

아이들

연초에 큰 다짐도 없었고 아이들이 코로나로 집에 있어서 더 정신없이 시작했던것 같다. 특히 호야가 코로나 이후 학교생활에 약간 갈피를 잡지 못하여 많은 시간을 이야기하고 같이 해야 했다. 내년에 있을 김나지움 지원으로 여전히 지금까지도 모두가 조금씩 스트레스를 받으며 지내고 있다. 빨리 지나가버렸으면 하는 마음도 있지만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게 무엇인지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호야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에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푹 빠지는 반면, 관심없는 일에는 시큰둥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취도는 높은 편이다. 그 성격에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으며 하는지… 옆에서 보는 내가 안타까울 때가 많다. 그래도 여러 모로 성숙해지고 성장하는 부분이 많았던 한 해였다. 이제 슬슬 2차 성장이 시작되는 듯 하니 내년에는 바깥에서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내야겠다.

시우는 가장 아이다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아직도 사라지지 않는 애교에 누구나 본인의 감정을 알 수 있게 표현하는 솔직한 성격덕에 자신의 감정을 충실히 공유하고 또 공감받으며 지낸다. 막둥이라 누나, 형을 보고 배우는 것들이 많아 빨리 배우는 것도 있지만 시우는 자기가 싫은 일이라도 집중해서 하는 성격이라 주어진 일을 하는데 망설임이 없다. 학교에서도 반장을 하면서 반 친구들에게 인기가 많고 심지어 반에서 가장 인기 많은 여자친구한테 프로포즈를 받는! 경험도 하였다. 그 뒤의 대처가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황당해서 우리에게 큰 웃음을 줬다. 이제 성적표가 점수로 나오는 3학년이 되었는데, 시우 반 만의 특징인지 아이들이 점수에 민감하고 관심이 많아 보이는게 시간이 지날 수록 이 곳 독일도 한국처럼 이런 객관적이고 눈에 보이는 점수에 민감해진다는 느낌이 든다.

지우는 늘 그렇지만 올해는 특히 더 즐겁고 행복한 1년을 보낸것 같다. 학교가 너무 좋고 재밌다는 말은 하루 걸러 하루씩 이야기 하고, 점점 관심이 꺼져가는 듯한 바이올린에 갑자기 불이 붙더니 하루에 2시간이 넘게 스스로 연습하고 있다. 여자 아이들 특유의 그룹 문화에 조금 적응하는 듯 하더니 역시 자기 맘에 안드는건 아닌건지 여기저기 다른 친구들도 만나고 사귀면서 관계를 넓혀가기도 했다. 자세한 이유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공부에도 자신이 좋아하는 것 이상으로 불이 붙어서 나름 공부도 열심히 하고 좋은 결과를 받고 있다. 몇몇 선생님들이 수업 시간에 지우를 띄워주고 다른 친구들을 도와주게 하는데 이럴 때면 아주 신이 나는것 같다. 무엇이든 열심히 하고 더 하려고 하니 나는 지우와 발 맞춰주기가 버겁지만 선생님들은 좋아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어느 날은 친구들 얼굴을 관찰하고 오더니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가 제일 이쁜것 같다는 말도 하고 ‘나는 외로워, 남자 친구가 필요해’ 라는 내용의 시를 영어로 쓰는 누가 봐도 10대 여중생! 승마 캠프도 다녀오고, 늘 그렇듯 올해도 가장 알차게 시간을 보내지 않았을까 싶다.

우리들

정은이는 가을까지 독일어를 배우느라 더욱 바빴던것 같다. 여전히 정성들인 아이들 도시락과 여러 집안 일을 같이 하면서도 4시간씩 수업을 듣고 또 공부를 했으니… 그 결과로 올 해 정은이의 영주권을 받게 되어 보람도 있었고 의미도 있었던것 같다. 나는 딱히 일 말고는 한 게 없는 것 같다. 회사일이든 집안일이든 눈에 보이는 대로… 우리 둘 다 나이들어간다는 것을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느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운동을 단 1일… 했다고 기억하고 있다. 아이들이랑 농구, 산책정도 말고는 정말 몸을 움직이지 않았던것 같다. 가을 이후 우리 둘 다 코로나 백신을 맞고 몸 상태가 조금 이상하게 바뀐것 같은데 나는 그 뒤로 카페인과 알콜을 많이 줄이게 되었다. 3달 넘게

베를린에 직원이 늘어나면서 페이롤 컴파니를 통해 고용계약을 맺게 되었다. 여전히 프리랜서 신분을 유지하고 있어서 뭔가 내 일을 할 수는 있는데 할 일도, 시간 여유가 없다. 회사일은 기본적으로 양이 많고 여러 업/다운이 있어서 당연히 바빴다. 추가로 개발자를 채용했어야 했는데 해고를 하는 바람에 막판에 일에 치인것도 힘들었다. 삐걱거리던 QA파트를 내가 맡아 시니어 1명과 주니어/레귤러 5명을 채용했다. 온보딩에 팀빌딩에 전반적인 테스팅 환경 조성에 너무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이제 조금 굴러간다 싶을 정도로 가고 있다. 내년 초에 추가 인원들이 합류하면 혼자 잘 굴러가게 만드는게 목표다. 그 와중에 개발자 친구 한 명을 채용했는데 이번에는 조금 더 관심을 두고 가이드를 줘서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갈 생각이다. 전 회사와 다르게 모두 내 손으로 뽑은 사람들인 만큼 더 애정이 생기고 책임감이 생기는 것 같다. 여름엔 회사일 말고 형이랑 프로젝트를 하나 했는데 ThreeJs로 게임을 만드는 작업이었다. 모바일 웹에서 동작해야 하고 웹사이트/서비스까지 붙이는 작업이라 많이 힘들었지만 즐거웠고 많이 배울 수 있는 작업이었다. 개인적으로 계속 배우고 유지하고 싶은 기술 스택이 ThreeJs 랑 WebGL 쪽인데 그 프로젝트 이후로는 손도 못대고 있다. 이 와중에도 늘 내만의 개인 프로젝트를 하고 싶었는데 모바일 앱을 만들지 게임을 만들지 고민하다 작은 게임 프레임워크를 만들어 놓고 정체되어있을 때 정은이의 조언으로 원래 해보기로 했던 간단한 모바일 앱을 만들어 보기로 했다. 조금씩이지만 천천히 꾸준히 만들어 뭐라도 출시해 보는 것을 목표로!

여행

작년 폴란드 여행의 추억이 많아서 우리는 다시 한 번 폴란드 여행을 다녀왔다. 이번엔 아우슈비츠와 폴란드 남부지방 자코파네를 들렸는데 체력적으로 지쳐있을때 다녀온 여행이라 조금 힘들었지만 아이들과 많은 추억을 만들고 왔다. 유럽에서 순위권에 꼽히는 롤러코스터도 타 보고, 역사의 현장인 아우슈비츠와 자코파네의 멋진 자연을 보고 돌아왔다. 하지만 그 뿐… 당일치기 나들이 말고는 아무곳도 다녀오지 않았다. 코로나와 바쁜 일, 바쁜 일상 때문이라고 하지만 조금 아쉬운 마음이 있다. 한 편으로는 당일치기 나들이를 많이 다녀온것 같기도 하고… 내년엔 조금 더 기억에 남을 수 있는 작은 여행을 많이 다녀보고 싶다. 코로나 4차 유행이 오기 전에 출장으로 텔아비브에 다녀왔는데 일만 하다 와서 딱히 기억이 남지는 않는다. 이스라엘의 무질서함이 눈이 거슬려 마음이 불안했고 베를린 공항에 와서 질서 정연하게 정리된 주변을 보고 안도감을 느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우리의 의지와 관계없이 주변에서 여러 일들이 일어났는데 작년에 이어 사람들간의 관계에 대해 여러 번 생각할 수 있었던 일들이 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우리는 이런 상황들을 보며 반면교사 삼아 우리 스스로가 성장할 수 있는 계기나 기회로 만들 수 있다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했다. 결국 모두가 그렇지만 비슷한 사람들 끼리 만나게 되는것 같다. 아이들 교육, 먹거리, 일, 관심사 등 무언가 비슷한 부분이 있어야 서로 배우고 발전할 수 있으니까… 그래서 그 분들께 감사하고 또 앞으로도 더 가깝게 지내야겠다는 생각들을 하게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 또한 인간적으로 더욱 성숙해져야겠지…

내년의 가장 큰 이벤트는 무엇보다도 호야의 초등학교 졸업이 될 것 같다. 회사에서 만드는 게임이나 스스로 진행하는 프로젝트가 세상에 나올 가능성이 큰 시간이기도 하고 더 건강해 지기 위해 많은 노력을 시작하는 시간이기도 할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 온 가족이 건강하고 행복한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Technical softlaunch

지난 주 부터 만들던 게임의 기술적인 오류를 파악하고자 테크니컬 소프트 런치를 시작했다. 오랫동안 지원하지 않던 안드로이드 버전으로, 스토어 페이지를 새로 만들어 하루에 2000명 정도의 트래픽을 돌려 게임에 문제가 없는지 확인 중이다.

몇가지 오류가 보이지만 치명적인건 없는것 같은데… 조금 자세한 로그가 필요한데 휴가 시즌이 겹쳐서 1월이 되어야 버전을 올려서 테스트 해 볼 수 있을것 같다. 개발자 하나 자른 뒤로 폭풍 인터뷰를 통해 개발자 1명, QA 4명을 채용했다. 이제 개발자2, 테스터 7명을 관리하게 되었다. 곧 채용할 개발자 1명과 테크아티스트를 포함하면 10여명의 인력을 관리해야 하는데 리드 개발자로서의 역할도 있기 때문에 조금 버거운 면이 있다.

팀에서 2022년에 어쩌면 새로운 프로젝트를 진행할 가능성이 있는데, 그렇게 되면 거의 비슷한 규모의 개발팀을 꾸려야 하는데 그 때는 정말 관리만 해야 할까… 그건 그 때 가서 생각해야지…

1월 중순 – 말까지 테크니컬 소프트런치를 마무리 하고 2월엔 Monetisation softlaunch 가 계획되어있다. 기능 개발보다 부담이 덜하다면 덜하겠지만 이것저것 대응하는게 굉장히 손이 많이 가는 편이고 채용한 인력들의 온보딩을 신경쓰려면 여간 골치아픈게 아니다.

그 뒤에는 WW릴리즈가 기다리고 있을까? 2022년의 가장 큰 이벤트가 될 것 같다. 여름 전에 런칭하고 팀도 안정되어 제대로 된 휴가를 갈 수 있으면 좋겠다. 늦어도 1년이면 뭔가 트랙에 올릴 수 있을거라 생각했는데 2년이 꼬박 걸리다니 세상에 만만한 일이 없다. 꾸준히 한 걸음씩 나가는 방법 말고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해고

뽑은지 1년이 안된 개발자 한 명을 해고했다. 팀에서 나는 개발과 테스트를 책임지고 있다. 숫자로 보자면 개발자는 나를 포함 3명, 테스터도 3명인데 4번째 개발자를 뽑는 중이었다. 지난 번 회사와 다르게 기민하게 움직여야 하는 프로젝트 특성 상 기술경험은 기본이고 자기주도적인 개발자와 함께 일하고 싶었다. 그래서 뽑았던 첫 번째 개발자는 잘 일하고 있는 반면 두 번째로 뽑은 개발자는 늘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결과를 보여줬다.

우리 게임의 세부적인 개발 방식은 인터페이스만 공유하고 내부 개발은 죽이되든 밥이되는 본인들이 알아서 개발하는 방식이다. 개발 패턴도 프로젝트 전반에 적용하는 방법은 하지 않으며 필요없는 라이브러리도 일체 쓰지 않는다. 함수형 개발처럼 각자가 모듈식으로 만드는 식이다. 빠른 결과가 나와야 하니 버그가 없고 인터페이스 조건만 만족하면 개발 완료로 생각하고 해당 모듈이 문제가 많다면 내가 다시 그 모듈을 만들어 교체하는 방식이다. 이것 하나가 우리팀에서 일하기 위해 꼭 따라야 할 규칙이다.

개발 퍼포먼스와 별개로 약간의 커뮤니케이션 이슈도 있었는데 이건 주로 영어보다는 본인의 자아가 너무 강해 다른 사람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는 부분에 있었다. 합의를 하고도 하지 않은것 같은 찝찝함… 자신의 결정에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최선을 다 하지 않은것 같은 결과물. 결국 오너쉽의 문제이자 소통의 문제였다.

이러한 제반적인 문제는 본인의 퍼포먼스 하락으로 이어졌고 결과물에 문제가 많음은 물론 일정도 늘 딜레이되었다. 본인은 오늘의 문제를 체감하지 못하고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상상속의 뛰어난 개발자 기준으로 기존 코드나 방향에 대해 불평하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계속되는 일정 지연과 낮은 퀄리티를 개선해야 한다는 피드백을 여러 번 주었지만 크게 변하는 것은 없었다. 3주전 새로운 스프린트에 들어가며 나는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이번 스프린트 목표와 작업 리스트를 공유하고 본인이 측정한 예상 작업시간에 대해 이유없이 수락한 다음 모든 미팅과 업무를 방해하는 요소를 제거해 주었다. 그리고 그 리스트 중 죽어도 2주안에 끝낼 수 있는 작업만 가져도록 하였다. 우리 셋 중 가장 쉽고 작은 업무만 가져간 그 개발자는 역시나 2주 뒤에 그 업무를 끝내지 못했다. 타당한 이유가 있다면 일정이 딜레이 되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다. 하지만 매일 업무 공유 시간에 문제없다, 내일 끝난다를 반복하다 데드라인 전날 끝내지 못하겠다고 하거나 끝냈다고 했지만 완성도가 70% 미만인 상황… 1주일의 시간을 더 주고 완성도를 높여달라는 요청을 했으나 돌아온 대답은 2주가 더 필요하다는 것이다.

어떤 부분이 문제여서 이렇게 시간이 더 필요하냐고 묻자 여러 리스트를 주는데 대부분 본인이 지난 2주동안 완성했어야 하는 부분들이다. 그 중 1주일 치에 대한 업무를 내가 가져오고 새로운 데드라인에 동의했다. 그 1주일 짜리 업무는 내 손에서 반나절이 안되어 사라졌다.

스프린트 시작일로 부터 3주 째, 주말에 일하고 있는 티를 팍팍 내며 나한테 메세지가 온다. 업무하나는 빼고 다 끝낼 수 있다고…그리고 월요일이 되어 결과를 확인했는데 코드에서 일하기 싫다는 의지가 느껴질 정도였다. 그리고 또 똑같은 핑계… 일정 지연에 대한 이유가 뭐냐고 물어보니 내가 자신이 수립한 일정을 무시하고 더 짧은 일정을 요구했기 때문에 이것은 원래 일정에 맞춰가는거지 일정 지연이 아니라고 한다. 본인 입으로 말한 메세지들을 보내주니 말이 없다.

갑자기 다른 사람 코드 읽기가 힘들어 일정이 지연되었다고 한다. 이번 스프린트는 개발자 모두가 UI를 개선하는 부분인데 UI는 이 개발자가 조인했을때 만들어서 대부분의 코드가 본인 코드 뿐이다. 나는 어떻게 일했을것 같냐고 묻자 또 말이 없다.

이러한 경험은 익숙하다. 처음 조인 했을 땐 모두가 의욕적이지.. 그래서 허니문 기간이라는 말도 하고 최소 3개월, 길게는 1년… 시간이 지나면 진짜 그 사람이 보인다. 나는 왜 인지 모르겠지만 아주 동물적으로 이 변화를 잘 감지하는것 같다. 지난 회사에서 내가 해고했던 몇몇 개발자들의 공통점이 바로 이것이다. 초반에 오바하기, 빨리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본인의 성장 욕구에 우선한다는 것. 닫혀있는 귀. 객관적인 자기 평가 부족 등…

결국 문제를 본인 외부에서만 찾으려고 하는 것을 보고 나는 마음을 접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고용형태가 이스라엘-우크라이나 외주 업체 형태로 되어있어서 당일 해고가 가능했다. 월급을 더 받든 말든 그것은 모르겠지만…그리고 모든 똥들은 지금 내 앞에 쌓여있다. 짜증이 나지만 한 편으로는 다행이다. 이 똥들은 언젠가 누군가 치워야 하고 결국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을 테니까.

사람은 많다고 절대로 좋지 않다. 사람이 적으면 느린것 같지만 제대로된 사람과 함께 일하면 결국 그것이 가장 빠른 길이다. 다음 개발자는 더 신중하게 채용해야겠다. 개인적으로 한 가정의 가장의 직장을 잃게 한 것에 불편한 마음이 있지만 본인 표현만큼 대단한 개발자라면 곧 더 좋은 직업을 구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회사 대표가 이야기 해 준 바에 따르면 동유럽에서 채용했던 몇몇 개발자들은 회사 몰래 투잡을 뛰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퍼포먼스가 급격히 떨어지고 일정을 계속 딜레이 한다면 그 부분을 의심해 봐야 한다고… 이 개발자도 아마 그런 경우일지 모른다. 난 개인적으로 본인이 2잡을 하던 3잡을 하던 상관없다. 자신이 스스로 약속하고 그것을 지키려는 노력만 있다면 충분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