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번의 종신 계약

2018년의 빅뉴스라면 단연 ‘이직’ 이라고 할 수 있겠다(또?). 2014년, 계획에 없던 취직을 위해 이곳저곳 구직사이트를 들락거리다 들어가게 된 Yager. 독일의 몇 안되는 AAA스튜디오, 당시 핫하던 데드아일랜드 IP 그리고 언리얼엔진4라는 당시로서는 새로운 기술을 이용한 프로젝트. 여러가지 조건이 맘에 들어 열심히 일했었다. 더 많이 알아갈 수록 실망스러운 부분도 보였지만 내가 개선하고 공헌해 긍정적인 변화를 만들어내는 것도 즐거움 중의 큰 부분이었다.

몇 번의 실망스러운 마일스톤 릴리즈가 있었지만 딥실버라는 대형 퍼블리셔가 이미 많은 부분 투자를 한 상황에서 다들 조금은 나타해져 있었는지도 모른다. 프로젝트가 취소된 그 전날도 내 분야가 아닌 곳에서 반 흥분상태로 심각한 언쟁을 벌이고 있었다. 렌더링 성능을 올리겠다고 수정한 엔진 코드가 내가 추가하고자 하는 기능을 동작하지 않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니 녀석의 코드 변경이 렌더링 성능과는 관련이 없을 뿐더러 엔진코드를 수정해 발생하는 유지보수 리소스를 감당하지도 말자는게 내 의견이었는데, 그 녀석은 근거도 없이 자기가 옳다는 말만 계속했다. 내일 관련된 사람을 불러 다시 싸우자!는 약속을 하고 집으로 갔는데 그게 그 언쟁의 마지막이었다.

회사를 그만둘 필요는 없었다. 사장님께서 친절하게 회사내의 다른 프로젝트로 옮길것을 제안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프로젝트 또한 데드아일랜드와 다를 바 없는 문제를 가지고 있었고 더더구나 사내에서도 성공 가능성을 낮게 보고 있던 프로젝트라(내 개인적으로는 실패를 확신) 미련을 가질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나는 내 영주권이 나올 때 까지 안정적으로 지낼 수 있는 큰 회사를 찾아보게 되었다.

2015년, 독일의 미디어 대기업 프로지벤의 자회사로 있던 아에리아 게임즈에 던진 이력서가 초광속으로 통과되었다. Yager 프로젝트가 취소 된 후 3개월의 유예기간이 있었지만 나는 서둘러 이직 프로세스를 진행했다. 연봉이 올랐으니 망설일 필요도 없었다. 대체 거기서 얼마를 주길래 그러냐며 강하게 붙잡던 HR의 리차리도 금새 잘가라며 배웅해 주었다.. 프로젝트 취소 후 2주만의 일이었다.

미국에서 시작한 스타트업 그리고 독일 대기업에 인수된 회사답게 모든일에 거침이 없었다. 개인에게 지급하는 비싼 개발 장비들, 허접했지만 비싼 돈을 들인 인테리어, 사내 마사지사, 1:1 어학강의 등등 그렇게 정을 붙여가고 있을 즈음 이 회사가 단 한번도 흑자를 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베를린 핫플레이스의 건물 7층을 독점하고 이렇게 돈을 쓰는 회사가 말이지.. 불안함은 곧 현실이 되어 모회사인 프로지벤이 앓던 이를 빼듯 회사를 팔기 위해 시장에 내놓았다.

독일의 게임 기업 사냥꾼인 가미고와 유럽을 거점으로 북미시장의 입지를 다지려는 한국의 스마일게이트가 인수전에 참여하는가 싶더니 애초에 골칫덩이를 떼어버릴 심산이었던 프로지벤은 당장 회사를 인수하겠다는 가미고에 회사를 팔아버리고 만다. 회사가 인수되는 시기는 독일에서 대량해고를 합법적으로 할 수 있는 빅챤스.. 가미고는 때를 놓치지 않고 수 많은 사람들을 짤라버리고 만다.

회사에서 짤리지 않을 자원으로 평가받아 수 번의 해고 위기를 벗어나 안도하던것도 잠시, 주위를 둘러보니 일을 할만한 사람이 남아있지 않았다. 여러가지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지만 신규채용이 막혀있으니 결국 희생을 하라는 말이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스마일게이트가 독자적으로 유럽지사를 만들기로 결심하면서 같이 일하던 헤드의 의욕에 가득찬 부름에 나는 호기롭게 사표를 던졌다.

2017년, 그렇게 스마일게이트 유럽에 합류한 나는 새로운 개발팀을 꾸리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렇게 2-3달을 보내고 나니 갑자기 본사에서 개발팀 관련된 업무를 무기한 보류시켰다. 이유는 알 수 없음(아마도 정치..). 개발팀을 꾸리려고 왔는데 채용할 헤드카운트가 열리지 않으니 할 수 있는건 프로토타입 개발과 퍼블리싱 지원이었는데 본사의 한국 직원들과 조금씩 소통할 수록 스마일게이트의 대단함(여러 측면에서)에 놀라게 되었다. 외부 스튜디오 개발을 감독하며 합작 타이틀 개발 릴리즈를 앞두고 본사는 스튜디오 철수를 발표하고 만다. 이 때가 2018년 5월.. 이유야 여러가지겠지만 딱히 예상하지 않았던 것도 아니니.. 다행인것은 여기 있는 동안 나는 영주권을 받았다는 것이다.

스튜디오 철수가 발표되던 날 저녁, 나는 정은이와 잛은 대화 끝에 1년정도의 휴식기간을 가지기로 합의한다. 그리고 다음날 오전에 전에 같이 일하던 동료로 부터 받은 페북 메세지 하나, ‘혹시 우리회사에 관심있니?’ 스튜디오 철수 소식이 아직 알려지지 않을 때 인데 어쩜 타이밍이..

아에리아에서 리드하던 시절 내 팀의 시니어로 있던 친구이다. 어디 스타트업에 들어가서 잘 하고 있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그 스타트업에 들어오면 어떠냐는 연락이었다. 아주 타이밍이 좋네, 관심있어! 라고 답장을 보내고 30분뒤에 대표한테 전화가 왔다. 짧은 통화 후 내가 그 친구의 리드였으니 기술면접을 볼 필요가 없다고 나머지는 HR이랑 이야기 하라는데.. 전화를 끊고 잠시 후에 HR로부터 연락이 왔다. 거두절미하고 얼마를 원하냐는 질문이… 이사람들아 나 아직 너네 사무실이 어디있는지도 모르거든?? 여튼 지금보다 많이 달라고 이야기 하니 다음날 연락을 준다고 한다.

별 기대도 안하고 있었기에 정은이한테는 말도 안했는데 다음날 가족비자 갱신을 하고 나오는 길에 네고 없는 오퍼를 받았다. 계약서를 우편으로 보낼테니 사인해서 보내던가 가져오라능… 이 모든 일이 24시간이 되지 않아 일어나다니..미쳐 정은이한테 진행상황을 알리기도 전에 결론이 나버렸다.

2018년 6월, 그렇게 나는 사무실도 가보지 않고 독일에서의 4번째 종신계약서에 서명을 하게 되었다. 아무 기대로 없이, 오히려 내 맘에 안들면 바로 그만둘거야라고 소리치고 들어간 이 회사는 의외로 내 마음에 들었고 내 맘대로 하고싶은걸 다 하게 도와주고 있다. 알고보니 1년전에 이미 링크드인으로 나에게 인터뷰 메세지를 보냈던 우리 싸장님.. 당시엔 다짜고짜 만나자는 메세지에 사기꾼으로 의심하고 읽씹했었는데..결국 이렇게 인연이 되는구나..

그리고 지금 시키지도 않은 일들을 하며 잔뜩 회사의 기대치를 올리는 일을 하고 있다. 다행인지 시키지도 않은 일들에서 좋은 성과가 나고 나의 잡다한 경험과 지식들이 다방면에서 빛을 발휘하는 운까지 따라주고 있다. 매니지먼트와의 ‘캐미’도 아주 좋아 창업자들과 친구처럼 노는것처럼 회사를 다니고 있다. 물론 일은 많지만..

4번의 종신계약, 이유없이 해고될 수 있는 총 24개월의 불안정한 수습기간, 그리고 서로 다른 환경에서 나를 증명하기 위한 각기 다른 노력들은 한 회사를 다녔다면 경험하지 않았어도 될 힘든 시간이었을것 같다. 하지만 내가 제어할 수 없는 상황이 아닌 나의 선택으로 상황을 제어할 수 있었고, 늘 높아진 숫자와 좋은 조건에 사인했으며 많은 동료들의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 여담이지만 그 덕분에 지금의 회사에 가기로 결정한 이후에도 같이 일하던 동료들로 부터 모두 4번의 러브콜을 받기도 하였다.

지멘스나 벤츠같은 독일의 대기업에 들어가는 경우 ‘종신’계약의 의미가 있지만 급변하는 IT, 게임 업계에서 종신계약은 큰 의미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딱히 한 회사에서 그렇게 일하고 싶지 않다면 영주권을 취득한 순간부터 ‘종신’ 보장이 지원되는 형편이니 딱히 두려움도 없다. 제일 짜증났던건 거주허가가 불안정했을때의 상황들이지..

게임업계를 떠나 바쁘게 지내보니 나 또한 앓던 이가 빠진것처럼 개운하다. 뭔가 게임으로 성공하거나 해내야 한다는 부담이 늘 떠나지 않고 있었던것 같다.

지금 회사가 어디까지 클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내가 그 과정의 큰 일부가 된다는 것은 확실히 알 수 있다. 그래서 어쩌면 더 재미있게 다니고 있는지도 모른다. 배우는 것도 많고 느끼는 것도 많으니 확실히 나는 성장하고 있겠지! 오래도록 이 즐거움을 경험하고 많이 성장 할 수 있도록 노력! 또 노력!

2 Replies to “4번의 종신 계약”

  1. 안녕하세요. 독일 이민에 대한 정보를 검색하다 우연히 방문한 후 몇 개월째 방문중인 30대 후반에 접어든 한 아이의 아빠입니다. 삶에서 묻어나오는 실감나는 글 잘 읽고 있습니다. 항상 배우고 갑니다.

    다름이 아니라, 독일에 대한 정보를 모으다가 벽에 막힌 기분이 들어 고민 끝에 염치없이 글을 남깁니다.

    몇 해 전 개발한 아이템으로, 이제서야 이민을 추진해 보려고 합니다.
    물론 개인입니다.
    모듈러 가구가 기본 베이스이고, 그 생산품으로 마케팅 방식을 새롭게 변형시키고자 하는게 저의 사업 방향입니다. 마케팅 과정에는 당연히 IT의 활용이 필수이구요. 도면은 계속 수정 중이지만 거의 완성단계에 있습니다. 저만의 착각일지 모르나, 모듈러 가구의 거의 마지막 단계가 아닐지 조심스레 예상해 봅니다.

    사실 처음 개발을 마친 시기에 이케아에 수차례 접촉을 시도했지만, 형식적인 답변만 돌아오더군요. 아마도 본사 방문 전에는 3d도면은 물론 스케치도 공개할 수 없다는 저의 단호한 입장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영어가 유창하지 않은 외국인이어서 그랬을 수도 있겠네요.

    그리고 지금은 캐나다와 독일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캐나다의 경우 스타트업 비자 제도가 있긴 하지만, 제조 관련 업종은 캐나다 내에서 시작이 쉽지 않다는 의견이 많아서 그나마 제조업쪽으로 개방적인 독일을 알아보는 중입니다.

    외국인인 제가 독일에서 스타트업을 하는것 자체가 수월하지 않아 보여서 블루카드를 목표로 독일 내 모듈러 가구 회사를 찾아보고 있는데, 저의 서칭능력이 부족한건지 찾기가 쉽지 않더군요. 제 입장에서 스타트업이 가능한지도 알고싶기는 합니다. 어떤 방법이 좋을지 조언을 해 주시면 더 감사하겠습니다.

    아, 참고로 저는 4년간 체육을 전공했습니다. 아버지 사업체 정리를 위해 제조업 설계분야에서 3년간 일을 했던게 이어져서 아이템 개발이 이루어졌구요. 하지만 그 마저도 2016년이 마지막 입니다. 그 후에는 이민 핑계로 호주, 독일, 캐나다를 답사 겸 구직활동 목적으로 다녀서 이렇다 할 경력이 없습니다. 세식구가 다니다 보니 그나마 모아둔 돈도 바닥이 보여 창업도 힘든 상황입니다. 참 골치아픈 상황이긴 하네요.^^

    글이 길어졌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가족분들과 좋은 시간 보내시고, 여유 되시거나 심심해질때 답변 주시면 됩니다. 가벼운 답변만 주셔도 저는 감사할 따름이니 부담 안가지셨으면 좋겠습니다. 다급한 마음에 귀찮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연이 닿아 독일에서 만나 뵐 수 있기를 바래봅니다.

    1. 안녕하세요. 막막한 길 앞에서 여러가지로 고민이 많으실것 같습니다. 죄송하지만 질문해 주신 부분은 저 또한 궁금하기도 하고 답이나 정보를 알고 있지 않은 부분입니다. 스타트업은 가능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5년전 저의 경험으로는 아무래도 초기 투자 비용이나 유지 비용이 손익분기점을 넘기기까지 계속 발생하니까 금전적인 부담이 클 수 밖에 없습니다. 이미 한국에서 검증되어 수익이 발생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독일에서의 스타트업 창업이나 지사형태의 창업도 추천드릴 수 있을것 같습니다.

      취업은 여러가지 케이스가 있을 수 있을것 같습니다. 이미 사업을 준비하실 정도라면 해당 분야에서 본인이 자신있는 분야의 기술을 포트폴리오 삼아 도전하시는게 좋을것 같습니다. 링크드인이나 xing 과 같은 사이트에서 관련 회사/직업을 찾아보시는게 좋을것 같습니다. 다면 해외에 있는 사람을 바로 채용하기에는 대부분 회사가 부담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아주 뛰어난, 혹은 회사에 꼭 필요한 사람이라면 무리해서라도 한국에서 채용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는 대부분 현지에 거주하는 사람을 우선으로(심지어 다른 도시도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채용하고 싶어합니다.

      – 회사가 채용하고자 하는 조건을 만족하는 사람
      – 회사가 있는 도시/혹은 근처에 거주하는 사람
      – 가능한 빨리 출근 할 수 있는 사람

      이 정도가 우선적으로 희망하는 사항이겠죠..
      그 다음으로는 연봉을 적게 부르는 사람, 받는 연봉에 비해 일을 잘하는 사람 등으로 옵션이 추가 됩니다.

      이미 비전이 보이는 사업을 구상하고 계시다면 한국에서 조그맣게 라도 시작해 보시는건 어떨까요? 눈에 보이는 사업과 성과가 있다면 실제로 구직을 하거나 사업체를 만드는 것은 조금 더 쉽고 안정적일것 같습니다. 부족한 돈을 마련하는 방법도 한국에서 실행하는게 더 쉬울 수 있을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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