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지난 한달여간, 머릿속에 수 많은 가능성들을 시험해 보느라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다 하고 싶고, 다 하기 싫고, 자신있다가 없고 그냥 짜증만 나고 몸도 계속 아팠던 지난 한 달. 감사하게도 마음속 하나의 큰 다리를 건넌 기분이다.

머릿속 관념을 깨고 비틀고 거꾸로 바라보니 무엇을 해야할지 답이 나왔다. 늘 그렇듯 답은 알고 있었다, 실천할 용기가 부족했을 뿐. 싫은건 걷어내고 좋은것 붙이면 되는거지. 손해보다 이익이 크면 하는거지. 해서 재밌으면 하는거지. 그렇다. 말은 쉽지..

나 스스로 공부하고 노력하고 이겨내야 하는 것도 있지만 우리 가족은 어쩌나? 물심양면으로 한창 신경써야할 토끼같은 자식들이 셋이나 있어서 우리 부부, 자식들만 키우기에도 버거운데, 내가 정은이한테 조금이라도 부담을 덜어와도 부족할 판에 부담을 더 지워주는 선택을 할 수 있을까?

그래서 깨고 비틀고 거꾸로 봐야 했다. 꼭 이래야 저런다는 관념이 내 인생에도 늘 적용되리라는 법은 없지 않을까? 아이들 키우는 부담도 줄고, 일하는 부담도 줄이고 그러면서 시간도 늘리고 버는 돈도 늘리는 일 말이다.

그게 가능하냐고? 지금 생각으론 많은 사람들이 그 결론을 못 내릴 뿐 이미 과정에서 스스로 증명하지 않았나 싶다. 이건 또 뭔 말이냐고? 한 달동안 아프고 생각을 많이 했더니 정리하기가 어렵다.

2020년은 나에게 이러한 가능성을 시험하고 또 조율하는 한 해가 될 것이다. 2014년 한국을 떠났던 그 때 그 마음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지난 5년간의 배움을 그 마음에 녹여내야지..

2019

2019년은 별 다른 일 없이 평안하게 지나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시우의 학교 입학처럼 많은 일들이 예측 가능했고 계획되었던 일들이었으니..

늘 그렇듯 예측하지 못했던 여러가지 일들이 있었으니, 그야말로 언제나 ‘다사다난’ 했던 1년이었다 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언제나 처럼 한 가지 결과는 다른 일의 원인이 되니 그것이 나쁜일이었는지 좋은일이었는지는 내가 어떠한 행동을 하는가에 따라 다를 것이다.

그 중에 지금도 진행 중인 몇가지 일들을 적어보자면 단연코 회사에 던진 나의 사표가 되겠다. 왜 사표를 던지게 되었는지를 따져보자면 사실 올해 두 번 승진하게 된 것이 가장 큰 원인일 것이다. 일이 힘들어서 못견뎠다면 그건 또 아니다. 더 많은 책임을 가지고 일들을 진행하다 보니 회사 내부 사정을 더 잘 알게 되고 거기서 경영진과 나 사이의 좁혀지지 않는 간극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냥 개발자로 있었다면 모르거나 모른척 넘어갈 수 있는 그런일들이 이제는 못본척 넘어갈 수 없는 위치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이 일의 다음에는 나의 새로운 도전이라는 또 다른 챕터가 기다리고 있다. 사표를 내지 않고 더 버티고 바꿀 수도 있었겠지만 무언가에 홀린듯 아무런 계획없이 사직을 하고 보니 내 앞의 가능성에 대해 더 생각해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조직에 특화된 기술이 아닌 내가 나로서 자립할 수 있는 기술들에 대해 더 고민하게 되었고, 사실 이미 무엇이 나에게 옳은 정답인지 알고 있었으니 크게 걱정할 상황은 아니었다. 다만 가장으로서 안정적인 수입을 포기한다는 것이 내심 아쉬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정도 수입에 만족하지 못하는 마음도 있었다.

그래, 가슴뛰지 않는 일은 하지도, 쳐다보지도 말자. 사람들도 다 쳐냈는데 이까짓 것들은 일도 아니다. 차분히 마음정리 몸정리를 하면서 생각하니 또 기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더 다사다난한 2020년을 만들 수 있을만한 일들, 나를 다시 한계로 몰아 붙일 수 있는 상황들, 내가 한 단계 더 성장할 수 있는 발판들 말이다.

지나간 일에 옳고 그름은 없다. 그 일로 말미암아 내가 그 다음 선택을 혹은 그 결과를 옳게 혹은 그르게 만들 수 있을 뿐이다. 정말 가능하다면, 매일 가슴뛰는 하루로 만들어 보고 싶다.

맥북프로 키보드 수리

내 맥북프로의 키보드가 애플의 특별 보증 수리에 해당된다고 하여 회사근처 그라비스에 수리의뢰를 한 것이 몇 주 전… 오늘 수리 완료된 맥북을 찾아왔는데, 내 맥북을 돌려주는 직원이 하는 말이, 이건 유니바디라 중간 레이어의 케이스와 거기 붙어있는 키보드, 스피커, 터치패드까지 모두 새걸로 교체했다고 한다. 비용은 물론 무료!

청소까지 깨끗이 해 놓아서 그런지 아주 새것이 되어버렸네..뭔가 좋은 예감이 든다! 이것 저것 세팅을 하고 나니 내 서버 꾸밀 때 처럼 뭔가 아련한..그 느낌이 온다. 늘 이런 기분을 느끼고 싶다.

사표를 낸 날 부터 감기에 걸려서 벌써 2주가 넘게 고생하고 있다. 좀 괜찮아지나 싶더니 더 심해져서 이젠 기침을 할 때마다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에..오늘 아침에는 코피까지 흘렸다. 몸 상하고 이게 무슨 고생인지.. 휴가가 끝나면 병원에 가서 꼭 검진을 받아야겠다. 그 동안 아파도 참고 회사에 나가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는데, 이렇게 아프면 다 무슨 소용인가 싶다. 누가 알아주는 사람이 있는것도 아니고.

몸도 좀 회복하고 다음 도전을 위한 준비도 열심히 해야겠다. 나이가 40이 되어서 아직도 뭐 하고 살아야 할지를 매일 고민하고 있다니 이게 좋은건지 나쁜건지..

또..

또 쉬운길 말고 어려운 일 찾고 있다. 정은이나 내 주변에 있는 사람은 어떨까..당연히 불안하겠지..

11월

나에게 11월은 조금은 쓸쓸하면서도 연말의 설레임이 시작되는, 그런 시간이다.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아주 드라마틱한 변화를 매일 매일 몸으로 느낄 수 있는 시간.. 길어지는 밤, 낮아지는 온도, 불편한 옷들을 하나 둘 껴 입어야 하는 그런 시간이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알 수 없는 수 많은 나뭇잎들이 자라나는 속도보다 빠르게 메말라 떨어지고 매일 밤 우리를 귀찮게 하던 작은 벌레들도 어디론가 자취를 감췄다.

모든 생명이 죽어가는 것 처럼 보이는 이 상황이, 나를 조금은 쓸쓸하게 만든다. 한국과 비교해 더욱 긴 저녁과 흐린 날씨가 또 한아름의 쓸쓸함을 그 위에 얹는다.

겨울이 오고 그리고 겨울이 가고 봄이 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온 세상은 생명력 넘치는 움직임으로 가득하겠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지난 몇 달 동안 여러 주제에 대해 깊이 생각할 기회가 있었다. 마음이 단련되고 성장하는걸 느끼지만 생각 했던 주제들이 어린 시절에 경험하기 어려운 것들이라는 점에서 조금은 씁쓸하기도 했다. 성장 보다는 늙어가며 깨달아 가는 느낌이라고 할까 ㅠㅠ

나에게 이 시기가 지금의 11월이길 바래본다. 나이가 들어가는 것이 아닌 여전히 성장하는 가운데, 추운 겨울을 견디기 위해 이파리를 떨구는 나무처럼, 나도 겨울을 준비하는 것이라는걸..

다시 서버 이전..

1기가 램으로도 디비가 계속 죽어서 이걸 어찌할까 하다가 일본에 있는 서버를 여기서 쓰는것도 웃기고 해서 독일 서버로 이전..독일에서 제공하는 가상 호스팅인데 월 5유로에 조건이 너무 좋다.

8기가 램, 4코어 시퓨 그리고 무제한 트래픽에 200기가 SSD? 이 조건에 월 5유로라니..10년전 같으면 사기라고 했을것 같다.

도메인 설정을 다시하고, 블로그 옮기는것도 이전에 도커로 해 놓은 지라 명령어 몇 줄로 땡… 서버가 가까워서 속도도 빠르고 램이 8기가라니..마음껏 낭비해 주겠어.. 서버를 세팅하고 무언가를 세상에 노출 시킬때 느끼는 그 설레임이 여전하다. 비록 아무도 찾지않는 블로그이지만 내 집을 짓는 그런 기분이 아닐까? 집을 지어본 적은 없지만..

이제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컴퓨터를 처음 접했을 때의 그 희열을 잊지 못한다. 그 이후 다른 무엇도 그 때와 같은 감정을 만들지 못했던것 같다. 내가 하려고 했던 수 많은 시도들이 컴퓨터를 처음 접했을 때 처럼 두근거릴 수 있었다면… 그런 일들로 가득한 삶을 산다면 어떨까..너무 신나겠지..

나의 오늘 하루를 돌아본다. 내가 내리는 결정과 선택에 어떠한 두근거림이 있었는지.. 나의 요즘을 돌아본다, 두근거림은 늘어가고 있는지 아니면 사라지고 있는지..

한참 덥더니 시원하게 비가 내린다… 문제는 오늘 자전거를 타고 왔다는 것.. 요즘 몸이 좋지 않아 일도 힘들고 집에서도 잠만 오는데 일찍 가지도 못하고 사무실에 갇혀있었다.

비가 살짝 그친 틈을 타 열심히 자전거를 달려 집에 도착했고 바로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무리해서 달리는 바람에 아픈 다리와 땀으로 젖어버린 몸을 보며 도대체 이게 무슨 바보짓인가 싶었다.

바보같은게 딱 요즘의 나 같다. 아니 바보같다기 보다 조금 미련하다는게 맞는것같다. 결국 푹 젖어버리고 다리까지 아픈걸..

Gaining trust

누군가를 선의로 도와줬는데 도움을 받은 당사자가 ‘선의’를 내 이익을 위해 본인을 이용한, 즉 ‘악의’ 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종종있다. 내 인생에도 크고작은..이런 일들이 있었는데 또 그런 경험을 하게 되어 조금 속상하다. 조금만 생각해 본다면 본인이 부끄러워질 만큼 나의 선의를 파악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심지어 상대방이 더 민망해질까봐 설명을 피한적도 있었다.

백이면 백 사과를 하거나 연락을 하지 않게 되는 두 가지의 결론이 나는데, 연락을 하지 않는 경우는 나에게 너무 민망한 나머지..혹은 끝까지 자신이 손해를 봤다고 생각하는 경우이다. 두 경우 내 입장에서는 아쉬울것 없지만 선의가 악의로 비춰질 수 있다는 경험 자체가 기분좋은 경험은 아니다.

사람을 잘 믿고 손해보는것에 크게 민감하지 않은 나를, 정은이는 답답해 한다. 정은이는 내가 얼마나 고생하고 신경쓰는지 알기 때문에 이런것들을 나누는 내가 못마땅하기 보다는 이것이 악의로 비춰지고 내가 상처받는것을 걱정하는 것이다.

예전에는 종종 상처를 받기도 했는데 요즘은 이런 일이 생기면 상대방의 그릇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으로 위로를 삼는다.

한가지 풀리지 않는 의문은 ‘물에 빠진 놈 구해줬더니 봇짐 내놓으라고 한다’는 식의 사고전환이다. 나 또한 다른 분들의 도움 없이 오늘이 있을 수 없었겠지만 가능하면 도움을 받지 않고 혼자 해결하려는 주의이다 보니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았다고 느꼈을땐 감사하다는 마음 뿐, ‘네가 더 이익이겠지’ 라던가 ‘네 이익 때문에 날 도왔겠지’ 라고 생각해본적도, 할 수도 없었다.

결국 나의 결론은 상호간의 ‘신뢰’가 형성되지 않은 상황에서 도움을 주고 받는 것은 서로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도움을 주거나 선의를 보이는 입장에서는 ‘너는 이익인데 날 믿지 않아도 상관없지 않아?’ 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기를 치는 것 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상대방의 신뢰를 쌓아야 할 것이 상대방을 돕거나 선의를 전달하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이 과정 조차도 서로에겐 신뢰를 쌓아가거나 잃어가는 과정 중에 하나일 것이다. 전생의 업을 따질 필요도 없이 이 업들이 서로의 관계를 정의하고 각자의 삶을 만들어 갈 것이다. 세상은 단순하게 사는게 이익인것 같다. 선의이든 악의이든 물에 빠진 놈 구하는거 포기하는건 어려운 결정이 아니다. 빠진놈이 아쉬운거지…

생각과 행동

생각은 쉽지만 행동은 어렵다. 행동을 하더라도 생각은 쉽게 잊혀지거나 바뀌기 때문에 꾸준히 행동하기도 힘들다. 늘 다짐하고 행동하려 노력하지만 꾸준히 변화하기 더 힘든 이유다.

내가 하기 힘든것을 나에게로 부터 강요받는 아이들도 똑같을 것이다. 아니 당연히 더 힘들 수 밖에 없다. 타인으로 부터 강요된 결정, 100% 납득하기 힘든 경우도 많으니 생각을 바꾸는 단계부터 힘들것이다. 그리고 이제 10년을 겨우 살아온 아이들이니..

무엇보다 부지런 해야 한다. 행동하기 전에, 생각하기 전에 내가 부지런 하지 않다면 결국 무엇도 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불행이도 난 부지런한가에 대한 질문에 스스로 대답하기 어렵다.

조금은 마음의 여유가 생긴 지금, 불안한 마음이 가시지 않은 이유는 지금 이 상태의 내가 스스로 만족스럽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때로는 그냥 어쩔 수 없이 바쁜 시간들이 행복할 수 있다. 바빠야 하는 순간에는 핑계도 있고 여유가 없으니까..

어쩌면 올해부터가 나의, 우리 부부의 그리고 우리 가족의 진짜 색깔을 찾을 수 있는 좋은 시작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거꾸로 이 시작점을 잘 만들지 못하면 오랜 시간 힘들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지난 일년, 우리가 서로를 만나게 된 것이 얼마나 행운이었는지 자화 자찬하며 보냈었다. 나는 우리가 이 시작점을 잘 만들수 있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4번의 종신 계약

2018년의 빅뉴스라면 단연 ‘이직’ 이라고 할 수 있겠다(또?). 2014년, 계획에 없던 취직을 위해 이곳저곳 구직사이트를 들락거리다 들어가게 된 Yager. 독일의 몇 안되는 AAA스튜디오, 당시 핫하던 데드아일랜드 IP 그리고 언리얼엔진4라는 당시로서는 새로운 기술을 이용한 프로젝트. 여러가지 조건이 맘에 들어 열심히 일했었다. 더 많이 알아갈 수록 실망스러운 부분도 보였지만 내가 개선하고 공헌해 긍정적인 변화를 만들어내는 것도 즐거움 중의 큰 부분이었다.

몇 번의 실망스러운 마일스톤 릴리즈가 있었지만 딥실버라는 대형 퍼블리셔가 이미 많은 부분 투자를 한 상황에서 다들 조금은 나타해져 있었는지도 모른다. 프로젝트가 취소된 그 전날도 내 분야가 아닌 곳에서 반 흥분상태로 심각한 언쟁을 벌이고 있었다. 렌더링 성능을 올리겠다고 수정한 엔진 코드가 내가 추가하고자 하는 기능을 동작하지 않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니 녀석의 코드 변경이 렌더링 성능과는 관련이 없을 뿐더러 엔진코드를 수정해 발생하는 유지보수 리소스를 감당하지도 말자는게 내 의견이었는데, 그 녀석은 근거도 없이 자기가 옳다는 말만 계속했다. 내일 관련된 사람을 불러 다시 싸우자!는 약속을 하고 집으로 갔는데 그게 그 언쟁의 마지막이었다.

회사를 그만둘 필요는 없었다. 사장님께서 친절하게 회사내의 다른 프로젝트로 옮길것을 제안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프로젝트 또한 데드아일랜드와 다를 바 없는 문제를 가지고 있었고 더더구나 사내에서도 성공 가능성을 낮게 보고 있던 프로젝트라(내 개인적으로는 실패를 확신) 미련을 가질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나는 내 영주권이 나올 때 까지 안정적으로 지낼 수 있는 큰 회사를 찾아보게 되었다.

2015년, 독일의 미디어 대기업 프로지벤의 자회사로 있던 아에리아 게임즈에 던진 이력서가 초광속으로 통과되었다. Yager 프로젝트가 취소 된 후 3개월의 유예기간이 있었지만 나는 서둘러 이직 프로세스를 진행했다. 연봉이 올랐으니 망설일 필요도 없었다. 대체 거기서 얼마를 주길래 그러냐며 강하게 붙잡던 HR의 리차리도 금새 잘가라며 배웅해 주었다.. 프로젝트 취소 후 2주만의 일이었다.

미국에서 시작한 스타트업 그리고 독일 대기업에 인수된 회사답게 모든일에 거침이 없었다. 개인에게 지급하는 비싼 개발 장비들, 허접했지만 비싼 돈을 들인 인테리어, 사내 마사지사, 1:1 어학강의 등등 그렇게 정을 붙여가고 있을 즈음 이 회사가 단 한번도 흑자를 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베를린 핫플레이스의 건물 7층을 독점하고 이렇게 돈을 쓰는 회사가 말이지.. 불안함은 곧 현실이 되어 모회사인 프로지벤이 앓던 이를 빼듯 회사를 팔기 위해 시장에 내놓았다.

독일의 게임 기업 사냥꾼인 가미고와 유럽을 거점으로 북미시장의 입지를 다지려는 한국의 스마일게이트가 인수전에 참여하는가 싶더니 애초에 골칫덩이를 떼어버릴 심산이었던 프로지벤은 당장 회사를 인수하겠다는 가미고에 회사를 팔아버리고 만다. 회사가 인수되는 시기는 독일에서 대량해고를 합법적으로 할 수 있는 빅챤스.. 가미고는 때를 놓치지 않고 수 많은 사람들을 짤라버리고 만다.

회사에서 짤리지 않을 자원으로 평가받아 수 번의 해고 위기를 벗어나 안도하던것도 잠시, 주위를 둘러보니 일을 할만한 사람이 남아있지 않았다. 여러가지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지만 신규채용이 막혀있으니 결국 희생을 하라는 말이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스마일게이트가 독자적으로 유럽지사를 만들기로 결심하면서 같이 일하던 헤드의 의욕에 가득찬 부름에 나는 호기롭게 사표를 던졌다.

2017년, 그렇게 스마일게이트 유럽에 합류한 나는 새로운 개발팀을 꾸리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렇게 2-3달을 보내고 나니 갑자기 본사에서 개발팀 관련된 업무를 무기한 보류시켰다. 이유는 알 수 없음(아마도 정치..). 개발팀을 꾸리려고 왔는데 채용할 헤드카운트가 열리지 않으니 할 수 있는건 프로토타입 개발과 퍼블리싱 지원이었는데 본사의 한국 직원들과 조금씩 소통할 수록 스마일게이트의 대단함(여러 측면에서)에 놀라게 되었다. 외부 스튜디오 개발을 감독하며 합작 타이틀 개발 릴리즈를 앞두고 본사는 스튜디오 철수를 발표하고 만다. 이 때가 2018년 5월.. 이유야 여러가지겠지만 딱히 예상하지 않았던 것도 아니니.. 다행인것은 여기 있는 동안 나는 영주권을 받았다는 것이다.

스튜디오 철수가 발표되던 날 저녁, 나는 정은이와 잛은 대화 끝에 1년정도의 휴식기간을 가지기로 합의한다. 그리고 다음날 오전에 전에 같이 일하던 동료로 부터 받은 페북 메세지 하나, ‘혹시 우리회사에 관심있니?’ 스튜디오 철수 소식이 아직 알려지지 않을 때 인데 어쩜 타이밍이..

아에리아에서 리드하던 시절 내 팀의 시니어로 있던 친구이다. 어디 스타트업에 들어가서 잘 하고 있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그 스타트업에 들어오면 어떠냐는 연락이었다. 아주 타이밍이 좋네, 관심있어! 라고 답장을 보내고 30분뒤에 대표한테 전화가 왔다. 짧은 통화 후 내가 그 친구의 리드였으니 기술면접을 볼 필요가 없다고 나머지는 HR이랑 이야기 하라는데.. 전화를 끊고 잠시 후에 HR로부터 연락이 왔다. 거두절미하고 얼마를 원하냐는 질문이… 이사람들아 나 아직 너네 사무실이 어디있는지도 모르거든?? 여튼 지금보다 많이 달라고 이야기 하니 다음날 연락을 준다고 한다.

별 기대도 안하고 있었기에 정은이한테는 말도 안했는데 다음날 가족비자 갱신을 하고 나오는 길에 네고 없는 오퍼를 받았다. 계약서를 우편으로 보낼테니 사인해서 보내던가 가져오라능… 이 모든 일이 24시간이 되지 않아 일어나다니..미쳐 정은이한테 진행상황을 알리기도 전에 결론이 나버렸다.

2018년 6월, 그렇게 나는 사무실도 가보지 않고 독일에서의 4번째 종신계약서에 서명을 하게 되었다. 아무 기대로 없이, 오히려 내 맘에 안들면 바로 그만둘거야라고 소리치고 들어간 이 회사는 의외로 내 마음에 들었고 내 맘대로 하고싶은걸 다 하게 도와주고 있다. 알고보니 1년전에 이미 링크드인으로 나에게 인터뷰 메세지를 보냈던 우리 싸장님.. 당시엔 다짜고짜 만나자는 메세지에 사기꾼으로 의심하고 읽씹했었는데..결국 이렇게 인연이 되는구나..

그리고 지금 시키지도 않은 일들을 하며 잔뜩 회사의 기대치를 올리는 일을 하고 있다. 다행인지 시키지도 않은 일들에서 좋은 성과가 나고 나의 잡다한 경험과 지식들이 다방면에서 빛을 발휘하는 운까지 따라주고 있다. 매니지먼트와의 ‘캐미’도 아주 좋아 창업자들과 친구처럼 노는것처럼 회사를 다니고 있다. 물론 일은 많지만..

4번의 종신계약, 이유없이 해고될 수 있는 총 24개월의 불안정한 수습기간, 그리고 서로 다른 환경에서 나를 증명하기 위한 각기 다른 노력들은 한 회사를 다녔다면 경험하지 않았어도 될 힘든 시간이었을것 같다. 하지만 내가 제어할 수 없는 상황이 아닌 나의 선택으로 상황을 제어할 수 있었고, 늘 높아진 숫자와 좋은 조건에 사인했으며 많은 동료들의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 여담이지만 그 덕분에 지금의 회사에 가기로 결정한 이후에도 같이 일하던 동료들로 부터 모두 4번의 러브콜을 받기도 하였다.

지멘스나 벤츠같은 독일의 대기업에 들어가는 경우 ‘종신’계약의 의미가 있지만 급변하는 IT, 게임 업계에서 종신계약은 큰 의미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딱히 한 회사에서 그렇게 일하고 싶지 않다면 영주권을 취득한 순간부터 ‘종신’ 보장이 지원되는 형편이니 딱히 두려움도 없다. 제일 짜증났던건 거주허가가 불안정했을때의 상황들이지..

게임업계를 떠나 바쁘게 지내보니 나 또한 앓던 이가 빠진것처럼 개운하다. 뭔가 게임으로 성공하거나 해내야 한다는 부담이 늘 떠나지 않고 있었던것 같다.

지금 회사가 어디까지 클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내가 그 과정의 큰 일부가 된다는 것은 확실히 알 수 있다. 그래서 어쩌면 더 재미있게 다니고 있는지도 모른다. 배우는 것도 많고 느끼는 것도 많으니 확실히 나는 성장하고 있겠지! 오래도록 이 즐거움을 경험하고 많이 성장 할 수 있도록 노력! 또 노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