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조심

독일로 와서 취직한 회사와의 고용 형태는 ‘종신고용’이다. 그래서 블루카드도 4년짜리를 받았고 33개월 이후 별다른 조건 없이 영주권을 신청할 수 있다는 점을 본다면 이미 영주권을 받은 것이나 다름 없는 상황..

회사에 다니면서 내 사업 준비도 해야지..이것이 나의 작은 계획이었고 회사일도 크게 힘들지 않고 이제 1년이 지나 여러가지로 적응이 많이 되면서 나의 프로젝트를 시작해볼 참이었다.

지인들과 대화에서 가끔 ‘여기는 해고 시키는 것도 엄청나게 힘들기 때문에 회사가 망하지만 않으면 영주권까지 고고씽이야!’ 라고 이야기 했었는데… 말이 씨가 된다고 회사가 망할 위기에 놓였다. 부모님께는 걱정하실까봐 아직 알리지도 않았는데..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속해있는 개발스튜디오 프로젝트가 돈줄인 퍼블리셔에 의해 취소되면서 회사가 법정관리 상태에 들어간것.. 아직은 고용계약 상태이고 법정관리하는 동안은 급여도 100% 나오기 때문에 당장 큰 문제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최악의 경우 회사는 파산할 수도 있고 그렇게 된다면 나의 고용계약도 취소가 되기 때문에 블루카드를 유지하기 위해 새로운 일자리를 구해야 한다.

독일어 B1 증명과 블루카드 상태로 21개월 이상 일했다면 영주권 도전을 하고 조금 편한 마음으로 있을 수 있겠지만(실업급여도 받으면서..) 나는 이제 15개월..(B1증명도 없음)

정확한 절차와 최악의 경우를 생각해 보니 엄청난 위기는 아니지만 험난한 구직 과정을 또(?)거쳐야 한다고 생각하니 스트래스가 밀려왔다. 더구나 지우는 학교에 엄청 잘 적응하고 있는데 다른 지역으로 옮겨야 한다면 그것 또한 스트래스..나 또한 여기서 이사하는게 엄두가 나지 않는데..

상황은 이렇다..7월부터 회사는 법정관리에 들어갔고 3개월 동안 관리를 받게 된다. 이 기간동안 회사는 회사를 살릴 수 있는 기회를 찾아야 한다(새로운 프로젝트 계약 등). 그리고 이 기간동안의 급여는 고용자 조합에서 100% 지급된다. 3개월동안 별 성과가 없으면 회사는 파산하게 되고 성과가 있다면(다른 회사의 인수나 신규 프로젝트) 다시 살아나게 된다. 파산을 하게 되면 고용계약이 취소가 되는데 하루아침에 고용계약이 해지 되는것이 아니라 2달 동안의 알림 기간이 주어진다. 즉 나의 경우 무려(?) 5개월 동안 별 일 없이 고용계약이 유지되는 것이다. 최악의 경우 내 고용계약은 11월 말일에 종료되고 그 날로부터 다시 3개월 이내에 다른 회사에 취직해야 블루카드를 유지할 수 있다. 그 기간은 내년 2월 말..시간은 충분히 있다.

문제는 베를린에 괜찮은 회사가 별로 없다는 것…하지만 나에게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일단 베를린에 있는 회사들에 지원해 보고 어려우면 다른 지역에 지원해 볼 생각이다.

직장생활을 한다는 것이 내 운명의 결정권이 다른 사람의 의사결정에 달려있어서 일찍부터 싫어했는데 독일에서 가장 빨리 영주권을 딸 수 있는 장점이 있어 나름 적응하려고 노력했었다. 하지만 역시 이런 일들이 생기니 조금 아쉽다. 하지만 이번 경험을 통해 확실히 독일은 직장인에게 너무 좋은 나라라는 생각도 든다. 프로젝트가 취소되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이 3개월 동안은 놀면서 돈을 받는다(회사에 나와서 논다..). 심지어 내가 가진 휴가를 다 쓰고 하반기에 다른 회사로 이직하면 거기서 또 휴가가 생기기 때문에 최대 45일정도를 올해 휴가로 쓸 수도 있다(–;;;;;;). 말이 45일이지 2달이 넘는 기간인데.. 거의 놀고 먹는다고 봐야할듯..그리고 덕분에 이 블로그를 통해 또 다른 구직 정보를 남길 수 있다는 것도 좋은 점…인가?

하여튼 우리 가족은 참 다이나믹한 인생을 살고 있는것 같다.

내가 언제나 마음속에 경험으로 믿고 있는 한 가지는 ‘언제나 위기속에 가장 큰 기회가 온다’는 것이다.

어떤 새로운 기회가 나에게 올지 기대된다(제발 스트래스 받는 상황은 오지 않기를–;).

아이들 적응은..?

지우야 오늘 가져가는 과자 친구들한테 나눠주고 다른 친구들이 또 달라고 하면 다음에 주겠다고 해. 다음에 또 줄게는 독일말로 어떻게 하는거야?

Morgen vielleicht! (Maybe tomorrow!)

적응 못할까봐 1년 늦게 학교를 보낼까 고민했던 것도 잠시..독일어 아는 단어는 오직 구텐탁,츄스,당케,피피막헨 4가지였는데(안녕,빠이,고마워,쉬마려), 6개월이 지난 지금은 아이들과 자유롭게 대화하고 선생님 말씀도 전달하고 읽기 쓰기도 제법 한다. 한국이었으면 올해 학교 갈 나이이고 생일이 늦어 사실 2년 일찍 학교에 간건데 학교에 가면 여기 저기 인사하고 아는 친구들 찾느라 바쁘고 여기저기 초대받아 놀러다니고 또 초대하고.. 숙제 더 하고 싶다고 미리 공부 다 해놓고 피아노 연습도 혼자 하고 정말 대단하다. 나는 8살 때 정말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그냥 학교에 우두커니 앉아있다 끝나면 동네에서 노는게 고작이었는데 지우는 할 것이, 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다.

누나와 달리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호야…

유치원에 가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혼자서 많이 논다. 아드리안이라는 단짝 친구가 생긴 뒤로는 부쩍 친구들과 어울리는데 자기들 끼리는 간단한 독일어를 한다. 이리와..같은거.. 선생님이 물어봐도 언제나 고개만 끄떡이는데 옆에서 보면 조금은 알아듣기는 하는것 같다. 예를 들어 차마실래 쥬스 마실래? 하면 쥬스를 가르킨다던가.. 호야는 어리고 부끄럼이 많으니까..하면서 별 기대 없이 있었는데..어느날 호야도 말을 하기 시작했다. 지우 만큼은 아니지만 유치원 다닌지 오래도 아니고 호야 성격을 생각하면 깜짝 놀랄 일이다. 대부분의 단어도 다 알고 있고..그 날 이후로는 자기가 궁금한거는 어떻게 이야기 하냐고 물어보고 적극적이 되었다. 호야도 이런 식이면 문제 없을 듯..

시우..

시우는 요즘 부쩍 말이 늘었다. 한참 말을 배우는 시기라 그런지 말이 많고 쫑알쫑알 시끄럽다. 독일어는 접할 기회가 없지만 기본적인 인사같은건 따라한다..누나 형이 있어 전혀 걱정은 안된다..성격도 젤 강해보이고–;

 

정말 다행이다..이 모든 것들이..

8개월

비자, 집, 아이들 학교, 유치원 문제를 해결하면서 정신없이 지내왔다. 남은 일들이 아직도 많지만 모두 우리의 노력에 따라 달라지는 일들 뿐이라 부담이 덜하다. 답답한 일처리와 달라진 환경에 좌절하고 조금은 우울했었던 이곳 독일.. 20년 전의 좋았던 점에 비해 너무나 그대로 인 독일에 실망까지 했던 나. 한국에서 환상적인 전원 주택 생활을 하다 50-100년된 허름만 집에, 그것도 아파트에 살아야 하는 답답함. 이 모든 것들이 우리를 많이 힘들게 했다. 어제 저녁 처음으로 정은이와 이 곳의 장점에 대해 이야기 했었다. 8개월 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벌써 당연하게 생각되어지는 그 장점들을 한 번 적어보려 한다.

– 보행자/자전거 천국
한국에서는 차가 없이 아이 셋을 키운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우리는 아직 차를 사지 않았다. 그리고 아이들이 조금 더 커서 주변 국가로 여행을 할 수 있게 되는 시기가 올 때까지 과연 차를 사는것이 맞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있으면 편하겠지만 없어도 큰 불편을 느끼지는 않는다. 대중교통은 물론 카 쉐어링도 잘 되어 있고 언덕이 없어 유모차를 끌고 다니는 것도 무리가 없다. 대부분의 인도는 자전거 도로와 함께 어마어마한 폭으로 만들어져있고, 노점이나 인도위 주차, 불법 간판같은것이 없어 더욱 편하게 다닐 수 있다. 물론 유모차라면 최 우선 순위로 배려해 주는 사람들의 의식도 너무 좋다.

– 공동체 의식
서양인은 개인주의가 강하다 했던가.. 물론 작은 단체의 소속감은 한국이 엄청나게 강하다. 반대로 말하자면 작은 단체끼리의 개인주의가 세계에서 가장 강할 수 있다는 말이다. 우리 가족, 우리회사, 우리 아파트, 우리 지역… 하지만 이 곳은 모든 사람이 한 공동체에 있다는 생각이다. 따라서 개개인은 개인주의가 강하지만 모든 집단에 대해 평등한 공동체 의식을 가지는 것 같다. 이건 말로 설명하기 힘든데 외국인 입장에서 굉장한 장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외국인 차별이 조만간 큰 사회문제로 떠오를 것 같다.

– 자연
베를린 도심의 공기가 용인 양지 전원 주택의 공기보다 좋다. 비도 그냥 맞고 다니고 마당에 오래 둔 물건들에 쌓이는 먼지도 깨끗하다.

– 교육
말할 필요도 없음. 교육을 딱히 잘 시킨다기 보다 모두 다 같이 경쟁하지 말자는 분위기가 좋다. 나도 맘 편하게 애들 놀릴 수 있으니. 그렇게 하고도 학생들의 성취도가 높다니 우리 나라에서는 참으로 억울할 일이다. 이곳 초등 1학년 지우는 학교에서 두 달동안 1부터 7까지 읽고 쓰는 법을 배웠다. 알파벳은 아직 모두 배우지 않은것 같다–; 학교 수업은 독어/수학/음악/미술/체육/종교 과목이 있다. 유치원은 무엇을 가르치는 곳이 아니라 그냥 애를 봐주는 곳이다…..–; 뭐가 좋은건지는 잘 모르겠다.

어찌보면 작은 것들인데 이런 부분들이 내 삶의 질을 높여준다. 한국에서 운전하고 차 관리하는 스트래스가 없으니 비용적인 부분을 떠나 속이 다 후련할 정도이다. 이젠 살림살이 장만이 남았다. 살림이야 욕심부리자면 끝이 없지만 우린 아직 티비도 없는 상황이라… 추운 겨울이 다가오지만 건강을 위해 자전거를 사서 출퇴근해보려 한다. 당장 다음주에 주문해볼까 하는데 베를린은 자전거 도둑이 극성이라니 이것도 참 걱정이다..

독일이 문제일까?

시간이 너무나 빠르다. 지우는 학교에 잘 적응하고 있는것 같다. 여전히 말은 통하지 않지만 그 또래 아이들은 말로 의사소통하는 비율이 그다지 크지 않다. 이번 주 부터는 가을 방학이 시작되어 2주간 논다. 논다기 보다…학교가 노는 곳인데 못놀게 되어(?) 조금 아쉬워 하는것 같다.

호야도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아직 적응기간이라 매일 조금씩 시간을 늘려가고 있는데 큰 문제 없어 보인다.

시우는 여전히 활발하고 많이 먹고 시끄럽게 잘 크고 있다.

이렇게 써 놓고 보니 아이들은 별 문제 없어 보인다. 사실 그렇다. 문제라기보다는 생각보다 더 잘해주고 있고 앞으로도 잘 할것 같다. 문제는 우리들이다. 아직도 하루하루가 너무너무 힘들고 정신이 없다. 정은이는 가끔 왜 우리가 독일에 와서 이렇게 고생해야 하는지 속상해 한다.

많은 부분이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 다르고 기대했던 것과도 다르다. 직접 겪어보는 생활은 어디에 살던지 비슷하고 언어가 통하지 않고 문화가 다르기 때문에 더 힘든 부분도 있다. 심지어 기후가 다르고 먹거리가 다른것도 큰 스트래스다.

아이를 키우고 있지 않다면 오히려 즐길 수 있었을 부분도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다. 애들이 셋이나 있고 아직 어리니 유럽의 중심에 와 있으면서도 베를린 바깥으로 여행이나 나들이 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 멀리 가 보고 싶은 곳은 많지만 지금 가 봐야 더 고생이라는 걸 아니 늘 집 근처 놀이터나 동물원만 다니고 있다.

더구나 아직도 장만하지 못한 살림살이가 많아 이것도 어마어마한 스트래스다. 특히 우리와 같이 결정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돈이 있고 없고를 떠나 이렇게 모든 살림을 장만해야 하는 상황은 어마어마한 스트래스다. 티비를 사야 하는데 티비장을 못골라서 못사고, 티비장을 사야하는데 쇼파가 없으니 컨셉을 못잡아서 못사고 쇼파는 사야할지 말아야할지 몰라서 모든게 멈춰있는 상태다.

신발엔 구멍이 뚤렸지만 아직도 맘에 드는 새 신발을 찾지 못했다. 아이들 물건은 그래도 어려움 없이 구입했는데 이것도 애들이 셋이다 보니 그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금요일이 지우 생일이라 킥보드를 사러 갔다가 이걸 3개를 사야한다고 생각하니 헛웃음이 나왔다. 보호대도 헬멧도 전부..

그래도 지우가 학교에서 방과후 과정까지 하고 오후 4시에 오고  호야도 다음주 부터는 그 쯤 집에 올 것이다. 그러면 정은이도 조금은 시간이 생기겠지..

그래봐야 우리는 아직 독일어 공부를 시작도 하지 못했다. 독일에 온지 반년이 훌쩍 넘었는데 말이다.

이러한 스트래스들이 독일에 와서 신난다는 기분보다는 우울한 기분을 많이 느끼게 한다. 그리고는 모든 원망이 독일에 집중되어 버린다. 물론 독일 생활 자체가 맘에 들지 않는 부분도 많다. 느린 일처리, 우울한 날씨, 맛없는 음식.. 하지만 근본적으로 우리 가족의 삶이 많이 바뀌었기 때문에 더 힘든 부분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자면 지우가 학교에 가기 시작했고, 호야가 유치원을 옮겼다. 사실 이것만 해도 한국에 있었더라도 어마어마한 변화이고 스트래스였을 것이다. 더구나 매일 집에 있던 내가 회사를 다시 다니기 시작한 것도 엄청난 변화이다.

결국 이러한 변화들을 일시에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이 가장 큰 어려움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렇게 2014년의 어마어마한 하루 하루들이 지나고 있다. 단 하루도 마음 놓을 수 없었고 머리가 터지고 헛구역질이 나올 만큼 고민했던 하루 하루들…

아직도 사야할 물건 해야할 일들이 산더미이다. 언젠가는 이런것들이 다 없어질 날이 올까…?

독일에 적응 중..

마지막으로 글을 쓴 게 언제이던가..

그리고 오늘까지 정말 어마어마한 일들이 있었다. 정신적으로도 굉장히 힘들었고 정말 미칠것 같았던 시간들..중간 중간 즐겁고 행복했던 시간도 많았지만 무엇하나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았던 시간들이었다.

비자 문제가 해결되자 이제 우리 가족에게는 실제 독일에 적응해야 하는 문제들이 산더미 처럼 쌓여있었다. 어느 것 하나도 작게 생각할 수 없었던 일들..하나하나 다 쓰자니 당시의 스트래스가 밀려오는 것 같아 벌써부터 머리가 아프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리니 짧게라도 기록을 해 두어야 겠다.

집구하기

회사에 들어가고 두 달동안 회사의 아파트에서 임시로 생활 할 수 있었다. 그 동안 집을 구해야 했는데 한국에서 집을 여러번 구해봤지만 이처럼 이해가 되지 않는 시스템은 처음이었다. 모든 칼자루는 집주인이 쥐고 있었다. 집주인이 확인하는 세입자의 조건은 대부분 비슷했다. 가능하면 아이가 없거나 적을것, 수입이 많고 안정된 직장임을 증명할것, 때로는 구체적인 월수입 금액이 있었다. 빚이 없다는 것을 증명할것. 전에 살던 집에 집세를 잘 냈는지 전 집주인에게 확인..그러고도 조건이 비슷하면 그 사람들만 따로 모아 인터뷰. 물론 외국인이라면 또 마이너스 요인이다. 독일어를 못하면 추가로 마이너스.

애 셋 달린, 이제 막 한국에서 온 우리 가족에게는 정말 집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 였다. 이렇게 하고도 좋은 집을 골라가는게 아니라 집주인이 허락하는 곳에 맞춰 가야한다는 사실, 그리고 복비가 없는 집도 많지만 있다면 월세의 두달 반 정도에 해당하는 비용을 복비로 내야 한다는건 무슨 사람을 약올리는 것처럼 보였다.

인터넷 사이트에서 맘에 드는 조건의 집을 발견하면 전화나 이메일로 방문 약속을 잡고 집을 구경한 후 맘에들면 관련 서류를 전달한다. 집 구경 후 집주인의 허가가 나올때 까지 걸리는 시간은 보통 7일~10일이다. 집 보는 것도 마음대로 약속을 잡을 수 없으니..아차 싶어서 여기저기 약속을 잡고 베를린 동서남북을 온 가족이 시간 날 때마다 돌아다녔다. 막상 가서는 거지같은 집에 실망하고, 비싼 집세에 좌절하고, 거절당해서 울고싶었던 기억들이 난다. 결국 1달 반이라는 시간을 투자해서 겨우 ‘조금’ 마음에 드는 집을 계약할 수 있었다. 비싼 복비를 냈기 때문에 경쟁자가 적었던 이유도 있었을것 같다.

다행히 집주인은 아주 잘 만난것 같은데, 사용하던 가구와 건조기까지 공짜로(처음엔 유료였지만 안쓴다고 하니 공짜로..) 빌려주었다. 집을 사는 방향으로도 알아보았는데 일단 여기에서 적응하는 것으로..적응이 되면 집을 사는 것도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것 같다. 살인적인 월세 때문에..

유치원

우리가 임시 거주지에 있는 동안 지우 학교를 보내야 한다고 프로나우에서 줄기차게 연락이 왔다. 정은이와 상의 끝에 내년에 학교를 보내기로 하고 이야기 했더니 의사의 소견서가 있어야 한다고 한다. 모든 예비 초딩들은 입학전에 학교의사한테 검사를 받는데 여기서 발달이 떨어지거나 적응이 어려운 아이들은 의사 소견에 따라 1년정도 늦게 학교를 보내기도 한다. 우리가 프로나우에서 미테로 이사를 했기 때문에 더 이상 자기 소관이 아니며 빨리 그곳으로 전입신고를 해서 자신을 귀찮게 하지 말아달라는 식의 이야기를 했다. 경찰에 문제가 될 수 있다는 말도 덧붙여가며..

부랴부랴 미테에 전입신고를 하고(전입신고 예약없이 하려면 기본 2-3시간 새벽부터 기다려야 한다..) 의사선생님을 만나 검사를 받았다. 지우는 학교에 가도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너무 잘 키웠다는 칭찬을 듣고 그냥 학교에 보내는건 어떠냐는 제안을 받았지만 언어를 문제로 미룰 수 있게 편지를 써 달라고 했다.

얼마 후에 학교 관련 암트에서 연락이 왔는데 의사 소견서 + 유치원자리를 확보하지 않으면 지우는 무조건 학교에 가야 한다는 연락이었다. 유치원 자리를 알아보려면 우리가 살 곳이 정해져야 하고 그 곳에 전입신고를 해야 하는데 당시에는 집을 못 구한 상황..스트래스가 어마어마했다. 결국 집을 계약한 이후로 전입신고도 하지 않고 주변 유치원을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유치원을 보내려면 시에서 발행하는 유치원 바우처(키타굿샤인)가 있어야해서 그것도 신청을 했다. 우리에게 주어진 기간은 7월 31일까지.. 회사 아파트 계약만료도 7월 31일, 새로운 집을 계약한 시점은 7월 20일정도..입주는 8월 1일 이었다.

새로운 집 근처의 유치원은 자리가 하나도 없고 한 정거장 떨어진 곳에 자리가 있다고 해서 가 보니 한쪽 팔에 대형 문신과 얼굴에 피어싱 대여섯개 정도를 한 선생님이 우리를 안내한다. 다른 선생님 한 분은 얼굴에 피어싱이 스무개 이상이었다. 이런 걸로 사람을 판단할 수는 없지만 일단 선생님에 비해 아이들이 너무 많았고 그냥 놀 뿐 딱히 독일어와 관련해 과연 지우를 이곳에 1년 보내는 것이 좋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래 친구들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궁금한게 많고 배우고 싶은게 많은 지우에게 심심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힘들겠지만 그냥 지우를 학교에 보내기로 결심했다.

7월 31일까지 등록하는 것도 불가능해 보였고..그래도 호야를 유치원에 보내야 해서 그 근처에 있는 유치원 한 곳을 더 알아보았다. 일반적인 킨더가르텐이 아니라 킨더라덴이라는 부모들이 운영하고 관리하는 유치원이었는데 시설은 조금 낙후되었지만 부모들끼리 커뮤니티도 있고 약간은 극성(?) 부모들이 잘 관리하고 있는것 같아 호야는 그곳에 보내기로 하고 계약을 했다. 그 때가 8월 초 였는데 9월 25일경에 호야를 보내라고 했다.

이사

집도 계약하고 혹시몰라 최대한 빨리 전입신고를 했다. 살림이 아무것도 없는 우리..다행인지 우리는 부엌이 있는 집을 구했는데 그거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사 첫 날 바로 냄비와 이불을 사러 갔는데 정은이 핸드폰을 잃어버리는 바람에 냄비만 사서 집으로 왔다. 집과 냄비…그릇도 수저도 이불도 아무것도 없는 집.. 우리는 냄비 박스를 잘라 바닥에 옷과 함께 깔고, 겨울 잠바를 덮고 첫날밤을 보낼 수 있었다. 당장 다음 날 캠핑용 깔게와 야외 돗자리를 사서 조금 업그레이드 된 잠자리를 만들었지만 너무 힘들었다. 결국 한국에서 보낸 이불이 도착하고 이케아에서 임시 메트리스 하나를 산 뒤에야 약간은 안정적인 잠자리를 만들 수 있었다.

살림이 너무 없어서 한꺼번에 모든것을 사는것도 너무 힘들었다. 선택과 선택의 연속. 돈은 둘째치고 뭘 사야할지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며 고르는것이 너무 힘들었다. 아직도 필요한 물품의 반도 마련하지 못한채로 살고 있다. 미리 주문한 세탁기는 집 앞까지만 배달해줘서 정은이랑 둘이 낑낑거리며 들어올리고 배달용 고정 나사를 풀지않고 돌려서 세탁기가 춤을 추기도 했었다. 인터넷 설치, 주말엔 이케아, 조립, 청소, 집에서는 또 인터넷 주문 등으로 아직도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제 뭐 고르라면 머리가 띵하고 아무것도 하기 싫어져버릴 정도…언제까지 계속 될 지 모르지만 아직도 살림 장만의 길은 멀게만 느껴진다.

짐 받기

집이 생겼으니 한국에 모셔둔 짐을 받아야 한다. 아빠한테 부탁하니 한 번에 10박스를 비행기로 보내주셨는데 막상 한 상자만 배달이 되었다. 나머지는 쫄..이라고 불리는 세관에 걸린것. 그 많은 짐을 어떻게 가져오나…관세는 얼마나 내야 하나..고민고민하다 아이셋을 데리고 감정에 호소해야 겠다는 정은이의 작전에 따라 정은이가 애들 셋을 데리고 쫄에 혼자 용감하게 출동했다. 결과는 대 성공. 쫄에서 다시 집으로 짐을 보내주었다. 시간이 좀 걸리긴 했지만 9상자를 무사히 잘 받을 수 있었다.

면허교환

독일에 온 지 반년이 다 되어서 한국 운전면허를 독일 면허로 교환해야 했다. 아무래도 조만간 차를 사야 할 것 같아서 미리 면허를 바꾸려하는데 이 역시 예약을 하고 가지 않으면 기다리는 시간이 많다. 리차리와 함께 갔는데, 지금까지 친절한 공무원만 만났던것과 달리 첫 인상만 봐도 깐깐하게 보이는 아줌마였다. 결국 이것저것 트집을 잡다가 사진이 오래되었다며 다시 가져오라고 한다..결국 지하철 역에 가서 즉석 사진을 찍어서 겨우 접수할 수 있었다. 발급에 4-6주가 걸린다고 하니..느긋하게 기다려야겠다. 정은이 면허도 해야 하는데 한국에서 재발급 받느라 동시에 접수하지 못했다.

학교

이 모든것을 처리하는 와중에 지우의 학교 문제가 현실이 되었다. 학교로 보내기로 한 것 까지는 좋았는데 대체 어떤 프로세스로 어떤 학교에 보내야 하는지? 우리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새로 전입한 곳의 관청에 문의하니 모든 학교가 방학 중이라 8월 25일까지 기다려야 지우가 배정받을 학교를 알 수 있다고 한다. 우리 집 근처에 가까운 학교는 3곳인데 그 중 체육을 강조하는 학교가 맘에 들었다. 꼭 사립학교 같기도 하고.. 그리고 혹시 몰라 사립학교도 알아보았는데 국제학교는 너무 비싸고 집 근처에 발도르프 학교가 있었다. 일단 학교 배정받는 것을 기다려 보고 사립을 지원해 보기로 했는데 8월 21일경 갑자기 두 곳의 공립 학교 중 한 곳을 정해서 등록을 하라는 연락이 왔다. 한 곳은 너무 멀었고 다른 한 곳은 걸어갈만 한데 터키인 거주 지역인지 거의 터키 외국인 학교처럼 보였다. 이중언어로 1학년때부터 터키어를 가르치는 학교..나쁜건 아니지만 독어도 영어도 못하는 지우가 너무 힘들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었다. 부랴부랴 발도르프 학교에 지원서를 내러 갔는데 발도르프인건 좋았는데 학교가 공사를 하다 만 상태로 운영이 되고 있는것 같았다. 그나마 서류 심사에 최소 2주에서 4주 걸린다는 대답을 듣고 왔다. 베를린의 입학식은 8월 30일이라는데…

회사 직원에게 부탁해서 집 근처의 모든 학교와 심지어는 이웃 구인 빌머스도르프의 학교에도 연락을 해 봤는데 모두 자리가 없다는 대답 뿐이었다. 기왕 학교를 보내는것, 입학식부터 함께 보내야 할 것 같아 터키어를 가르치는 학교로 보내기로 결정을 하고 26일 화요일에 등록하러 가려했는데 정은이와 아이들이 피곤해 해서 수요일에 가기로 했다. 막상 수요일이 되니 또 다들 피곤해하고 아침에 자고 있어서 그냥 목요일에 해야겠다고 혼자 회사를 가는 길에 우체통을 열었는데…보인 편지 한 통.

‘지우가 우리 학교에 배정되었으니 얼른 와서 등록하세요’ 어디서 보낸 편지인가 봤더니 우리가 처음에 보내고 싶었던 학교에서 보낸 편지였다. 체육강화 학교..집에서 걸어서 5분거리인 그 학교. 이게 뭔일인가 싶어 연락해보니 등록하러 오라고 한다. 아마도 전입신고할 때 자동으로 배정이 되어서 나중에 문의 했을 때 여유 자리가 없다고 했던것 같다. 아무튼 너무 기뻤던 우리는 목요일 아침에 학교로 갔는데 학교도 너무 가깝고 생각보다 더 좋아서 너무 맘에 들었다. 오후에 고양이 반에 배정받았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날 저녁에 바로 지우 가방을 사고(우리집에서 제일 비싼 가방일듯…ㅠㅠ) 몇 가지 학교에 필요한 물품을 샀다. 토요일이 입학식이고 그날 까지 준비할 물품과 슐튀테라는 고깔모양의 과자주머니(독일 전통)도 마련해야 해서 마음이 급했다. 정은이는 결국 자신이 만들겠다면 목요일 밤을 꼬박 새워서 초대형 슐튀테를 만들었다.

금요일에 출근하니 아침부터 인사팀 호출이왔다. 가서 보니 리차리가 심각한 표정으로 ‘We got a problem for Jiwoo’s school..’ 이러는데 이건 또 뭔가 싶다. 학교에서 지우의 기록을 확인해 보니 학교의사가 내년에 학교를 보내라는 의견이 있어 지우를 받을 수 없다는 통보였다. 우리가 지우를 학교에 보내려면 이 부분을 슐암트에서 다시 확인을 해야 하고 그 과정이 4주 이상 걸리기 때문에 일단 입학식에 참여할 수 없고 학교를 다니더라도 결과가 나와야 다닐 수 있다는 것. 만약 학교를 못가는 것으로 나오면 지우는 유치원에 가야 하고 학교는 내년에 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씨벌..욕이 절로 나오는 상황이었다. 그 간 독일에 정착하려고 참고 참고 또 참고, 정은이가 힘들어 하면 긍정적인 마인드로 어르고 달래고 그랬는데….학교 안보낸다 그럴 땐 학교를 보내야 한다고 지랄을 하더니 그래..학교 보낼게 하니까 이제는 안된다고 지랄이다.

곰곰 생각해보니 키타 굿샤인 신청 결과도 지우는 학교에 가야하니 안된다면서 거절했던 놈들이었다…머릿속에 별 생각이 다 떠올랐다. 신나서 가방 메고 다니던 지우..밤새 슐튀테 만들고 뿌듯해 하던 정은이… 이 소식은 우리 가족에게 대 충격을 주고 말 것이라는 생각도 떠올랐다. 치명타..그로기 상태의 우리 가족을 전멸 시킬 수 있는 치명타 말이다.

흥분을 가라앉히려 했지만 쉽게 되지 않은 상태에서 리차리 한테 말도 안되는 상황이고 내 딸에게 너무한 상황이다. 어떻게 해 볼 방법이 없을까? 물었더니..리차리도 독일사람이라고 이렇게 한 번 결정된, 그리고 서류로 일을 처리하는 독일에서 이 내용을 다시 바꾸는건 무리이며 절차대로 따지고 그 절차에 따라야 한다는 이야기를 한다. 즉 나의 사랑스러운 지우가 엄마가 밤새 만든 슐튀테는 버리고 한달동안 집에서 빈둥거리다 학교가라그러면 어디 중간에 쏙 들어가서 더 적응도 힘들게 하겠다는 말인데..아니면 내년까지 유치원을 다니던가.. 나는 그 상황을 상상하기도 싫었다. 그리고 리차리는 나의 모든 사정을 잘 알고 있었는데 리차리도 저정도로 의욕이 꺽인걸로 보아 이 상황은 쉽게 해결될 상황은 아닌것 같아 보였다.

이미 나의 머릿속에는 모든 상황을 이렇게 만든 관련인들을 고소할 계획이 수립되고 있었다. 처음부터 내가 이사했다는 이유로 지우에 대한 책임을 제대로 완수하지 않고 다른 구역으로 떠넘기려 했던 프로나우의 그 비서. 7월 31일까지 유치원 자리를 찾지 않으면 무조건 학교에 가야한다고 이야기한 라이니켄 도르프 유겐트 암트의 슐인스펙터. 8월 25일까지 기다리면 학교 배정을 해 주겠다는 구라를 친 쉐너베악의 슐인스팩터. 모든걸 무시하고 지우를 학교에 등록하러 오라고 한 학교 관계자. 우리 가족의 행복을 망친 너희들을 부셔버리겠어. 그리고 독일 식 행정 절차의 희생양이 된 지우의 사연을 독일 사회에 널리 알려야 겠다는 생각도…

이 긴 싸움을 시작하기 전에 다시 한 번 시도해 봐야 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리차리는 이미 전의를 상실한 상태였다.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거나 내가 직접 통화해 볼 생각으로 나에게 관계자들의 연락처를 알려달랬더니 리차리도 큰 일이 터질것임을 짐작했는지 나를 달랜다..자기가 다시 전화를 해 보겠다고 한다. 내가 다시 한번 키타굿샤인도 나오지 않았고, 의사 소견서의 언어 문제는 우리가 요청한 것이고, 니들이 학교에 가라고 했으며 우리도 학교에 보내겠다는걸 강조하라고 하고 옆에서 도끼눈을 하고 지켜보았다.

결국 리차리는 슐암트에 전화했고 우리의 의지를 확인한 암트에서 다시 학교에 연락을 했고 지우는 입학할 수 있게 되었다……

지난 토요일 입학식을 무사히 치루고 이번 주 아주 신나게 학교를 잘 다니고 있다.

 

독일에 와서 도전이 아닌 상황이 없었을 정도로 모든것이 도전이었고 그 때마다 우리의 현실이 많이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이제는 이러한 도전이 만만하게 느껴지고 뭔가 대등한 관계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 많은 스트래스 속에 조금씩 성장하고 있었던 걸까? 어느새 계절은 다시 추워지고 우리가 독일에 온지 딱 반년이 되었다..

지난 3월 발리에서 말레이시아, 프랑크푸르트, 베를린으로 도착했을 때..그 날로부터 반 년이라니.. 반 년의 시간동안 우리 가족은 더 많이 가까워지고 서로 배우고 성장한것 같다.

이제 호야 유치원 보내고(아직도 키타 굿샤인은 오지 않았다..), 살림 장만을 좀 더 하고, 집에 페인트 칠도 하고 그러면 조금은 생활이 안정될 것 같다. 그럼 정은이도 독일어 배우러 다니고 어쩌면 시우도 유치원에 보낼 수 있겠지..그 날이 올까 싶지만 머지 않아 오리라 믿는다.

이사온 이웃에 또래의 한국인 부부도 있고, 한인 교회가 있어 때때로 한국인들을 마주치고 도움도 받는다. 교회를 안다녀서 그런 도움이 조금 부담스럽긴 하지만 아이들 입장에서는 즐거운 일 중의 하나일 것이다.

어쩌면 가장 중요한 회사의 적응은 다른 문제들에 묻혀 그냥 넘어간것 같다. 회사 일이야 늘 하던 거라 큰 문제는 없지만 회사 스케쥴도 타이트해서 일이 많은 편이다. 야근을 못하게 하고 내 개인적인 일이 많아 시간이 조금 부족한 기분이지만 어찌어찌 잘 하고 있다.

오늘 새벽에 잠이 깨어 이렇게 글 하나로 나마 그간의 생활을 정리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그리고 오늘이 오늘이어서 다행이다…정말로.

 

독일 구직 후기#3 – 마무리

상황이 이렇다보니 회의감이 밀려왔다. 비자를 받는 것이 우선이기도 하지만 연봉을 떠나서 내가 취직을 하면 회사에서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에 대한 생각을 크게 해 보지 않았다. 그냥 막연히 좋은 회사가면 재밌는일 하겠지..이런 생각이었는데 곰곰히 생각해 보니 그냥 시키는 일만 하고 발전도 없이 시간을 보내야 할 것 같았다. 물론 돈 주는 어학원 다니는 셈 치고 다닐수도 있겠지만 그러기엔 내 인생이 조금 아깝다는 생각도 들었다.

90일 무비자 기간이 한달하고 몇주 남아있는 상황이고 독일 구인 프로세스를 보니 어디든 한 달만에 입사가 확정되는 것은 불가능해보였다. 함부르크의 D 회사는 면접일정 자체가 늦게 잡혔기 때문에 이 곳 또한 불안했다. 결국 구직비자를 신청하기로 하고 부족한 서류를 한국에 주문한 후 이번에는 크고 유명한 회사보다는 내가 하고싶은 일이 있는 회사를 찾아보았다.

3차로 이력서를 넣게 된 회사는 베를린의 게임회사 두 곳(I,J), 슈투트가르트의 회사(K), 헤드헌터의 모집공고(L) 이었다. 이 중 I와 K의 업무는 UI 개발과 디자인 쪽의 업무가 혼합되어 있었다. 내가 창의적으로 행동할 수 있고 환경도 새로운 부분이 많아 많이 성장하고 배울 수 있는 곳이라 생각되었다.

이력서를 넣자마자 헤드헌터 L 로부터 바로 전화가 왔다. 갑작스런 전화라 당황했는데 이것저것 많이 물어보고 잘 대답했다. 헤드헌터는 내 조건이 좋다면서 자신의 클라이언트에게 이야기 한 뒤 다시 연락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3-4일 후 I에서 1차 면접을 바로 보자는 메일이 왔고 J에서는 내 기술분야에 대해 적어 제출하라는 메일, K에서 전화인터뷰 메일이 왔다. K와의 전화인터뷰는 여러명과 스피커 폰으로 이루어졌는데(1시간) 가고 싶다는 욕심이 컸는지 평소보다 더 긴장해서 제대로 못봤다는 느낌이 컸다.

이후 헤드헌터로부터 연락이 와서 또 다른 전화인터뷰 일정이 잡혔다. 회사에서 하는 일은 고되어 보이지만 회사 자체가 젋고 재밌어 보이는 회사였다. 약 한시간 반 정도 인터뷰했고 잘 이야기 한 것 같았지만 아마도 내 생각에 헤드헌터를 통한 연봉의 압박때문인지 탈락했다. 이 회사는 돈을 많이 주지 않으면 갈 의미가 없는 회사였기 때문이다.

이후 베를린의 J회사에서도 전화 인터뷰 제안이 왔고 K회사에서 의외로 면접 제안 메일이 왔다. 많이 지쳐있기도 하고 가고 싶지 않은 회사의 인터뷰를 보는 것도 힘든것 같아서 함부르크D 회사의 최종면접과 베를린 J 회사의 인터뷰는 취소하였다. 베를인 I 회사의 1차면접은 아주 좋은 분위기에서 끝났다. 원래는 전화인터뷰를 보는데 내가 베를린에 있어서 바로 불렀다고 한다. 즐겁게 이야기하고 바로 다음날 2차 면접 제의가 왔다. 6시간동안 점심식사를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는 면접이었다. 대부분의 시간동안 즐겁게 진행되었고 마지막으로 오피스 투어를 한 뒤 면접을 끝냈다. 역시 바로 다음날 합격 통보와 함께 잡 오퍼를 받았다. 그리고 K 회사에 면접을 보러 갔는데 3시간이 넘는 시간동안 많은 이야기를 하였고, 회사 규모가 작은 반면 재미있는 일을 많이 하고 실력있는 팀원들과 안정된 수익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내가 지원한 포지션이 지금까지의 내 경력과는 조금 다를 수 있는 분야여서 많이 망설이는 것처럼 보였다. 당장 프로젝트에 투입하면 결과가 나올 수 있을까…? 하는..

결국 베를린I회사의 제안 기간이 다 되어서 나는 베를린 회사를 선택했고, 바로 다음날 K회사의 오퍼를 받았지만 선택을 되돌리기는 어려웠다.

약 한 달 반에 걸친 구직기간동안 많은것을 느꼈다. 일단 일반적인 회사 생활을 하지 않던 내가 정리되지 않는 경력으로 어필하기 매우 어려웠다는 것. 사람들은 내 사업 경험에  그 긴 시간동안 무슨일이 있었는지 궁금해했다. 나 또한 6년의 시간동안 어마어마한 경험을 했지만 너무 다향한 일들이라 내가 무엇을 했다라고 요약해서 전달하기가 굉장히 어려웠다. 아직도 아쉬운 부분이지만 내가 어떤 경험을 했는지에 대해 10%도 보여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영어가 많이 아쉬웠다. 한국에서 전화영어라도 해서 약간 준비를 했더라면 더 많은 기회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도 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잘 된것 같아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영어권 나라의 구직 프로세스에 대한 차이도 무시할 수 없었다. 커버레터와 이력서, 레퍼런스 레터까지..익숙하지 않은 인터뷰 문화와 분위기들은 나를 더욱 긴장하게 만들었다.

다만 초기에 전화 인터뷰 경험과 커버레터를 반복해서 쓰면서 구직 요령(?)이 많이 생긴것 같다. 그래서인지 마지막으로 지원한 회사들에서 좋은 반응들이 왔고 무리없이 인터뷰를 했던것 같다. 예를 들어 자기소개를 하는 경우 처음에는 무작정 두서없이 이야기 했는데 나의 백그라운드, 경험, 기술 이런식으로 카테고리를 나눠서 소개하니 더 반응이 좋았고 이후 인터뷰도 내 소개와 관련해 자연스럽게 진행할 수 있었다.

사회 생활한지 10년도 넘었고 내 사업이라고 시작한게 6년이 넘었지만 독일에서의 구직 경험은, 특히 나처럼 무대포식의 경험은 대졸 신입의 구직 경험과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알량한 자존심에 이런 구직 경험에 대해 숨기고도 싶었고(어디 떨어졌다는게 창피해서), 구직을 한다는 자체가 뭔가 패배스러운 상황으로 생각되었지만 이렇게 다시 도전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자랑스럽고, 나 스스로 세계 어디에서든 기회를 만들어 간다는 것도 행복하게 느껴졌다.

독일에 어떻게 적응을 할지, 회사생활을 잘 할지, 내 사업은 어떻게 할 지 이제는 잘 모르겠지만 늘 배우는게 있다면 나는 성장하고 있는 것이니까 크게 걱정은 되지 않는다. 내가 스스로 생각하는 ‘나’는 어쩌면 과대평가 되어있을지도 모른다. 결국 사회에서 다시 나에대한 평가를 해 주겠지..여기서도 해내지 못한다면 결국 한국에 있었어도 실패할 수 밖에 없었을테니까..

이로서 독일에서의 구직 경험에 대한 정리는 끝!

 

 

 

독일 구직 후기#2 – 본격적인 구직

처음에 이력서를 넣은 회사는 모두 세 곳. 플래시 게임을 만드는 곳들인데 업계에서 유명한 회사들로만 골라 넣었다. 함부르크에 한 곳(A ), 그리고 마침 세계적으로 유명한 회사가 베를린에 지사를 만든다고 하여 보니 나와 업무는 조금 다르지만 그래도 괜찮지 않을까 싶어 이력서를 넣었다(B). 또 다른곳도 베를린에서 가장 뜨고 있는 회사 중 하나인데, 여긴 특별히 오픈된 포지션은 없고 이력서를 등록하는 시스템인데 이곳에도 이력서를 넣었다(C). 지금 생각하면 이 두 곳은 애초에 지원할 필요가 없었던 곳이었다. 1주일 뒤 A에서 전화 인터뷰 제안이 왔고 B에서는 탈락 메일이 왔다.

내가 경험한 대부분의 회사는 jobvite 를 이용해 채용을 진행하고 있었다. 따라서 linkedin 과 같은 소셜네트워크에 자신의 이력과 인맥을 관리하고 있다면 굉장히 편하게 지원할 수 있다.

달랑 세 곳에, 그것도 두 곳은 뽑을지 안뽑을지도 모르는 곳에 지원해 두고 1주일을 기다렸다니..당시에는 처음이라 그냥 막연했던것 같다. 그래도 운좋게 A 회사와 전화인터뷰를 하였는데 영어가 너무 걱정이 되었다. 한국에서 책을 세 권이나 번역했지만 전문서, 그것도 프로그래밍 분야였고 내가 직접 영어로 누군가와 대화해 본 기억은 2001년 캐나다에서 엄마아빠랑 민박집에 자면서 아침에 집주인 할머니와 나누었던 짧은 대화가 끝이였다. 12년 만에 영어회화를..그것도 전화로 하려니.. 인터넷을 뒤져 여러 예상 질문을 보고 스크립트도 작성해보았다. 그리고 전화면접..다행인지 상대방이 독일사람이어서인지 오히려 영어는 알아듣기 편했고 상대방도 내 말을 알아듣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다만 일반적인 질문에는 대비했던 반면 어떻게 팀으로 일을 할것인가와 같은 질문에는 생각한 바가 없어서 솔직하게 이야기 한다는 것이 나중에 생각해보니 팀 플레이에 맞지 않은 사람으로 판단된것 같았다. 30분 정도 통화했지만 결국 전화 인터뷰는 낙방..

이렇게 되기 까지 2주라는 시간이 지났다.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했고 이제는 결과와 관계없이 이력서를 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번째로 이력서를 낸 곳은 함부르크의 다른 회사(D), 1차에 지원했던 B 사의 영국 본사(E),  뒤셀도르프의 게임회사(F), 내 포지션과 맞지 않지만 괜찮아 보이던 회사(G) 이렇게 이력서를 냈다.

E 회사와 G에서 약 4일만에 연락이 왔다. E는 전화 인터뷰 제의를..G는 바로 탈락. E 회사는 B 의 본사인데 포지션이 나와 맞았기 때문에 혹시나 하고 지원했는데 전화 인터뷰 제의가 왔다. 근무처는 영국 런던..그러니까 영국사람과 전화인터뷰를 해야 한다는 것이지..절망감에 빠져있을때 독일이 아니어도 좋으니 함 도전해보자 하고 지원했는데 막상 인터뷰를 보자고 하니 겁이났다. 전화인터뷰는 약 25분정도 였고 영국 발음에 말이 엄청 빠르고 더듬기까지 해서 거의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핵심 내용은 알아듣고 어찌어찌 대답은 잘 했다. 통과하면 메일을 주겠다고 했는데 아직까지도 아무런 연락이 없다..ㅠㅠ 이후 F 회사에서 탈락 소식이 전해지고 D 회사에서는 특이하게 연봉부터 물어보았다. 결국 자신들이 줄 수 있는 연봉은 이정도라면서 기술 테스트를 보자고 한다. 이 와중에 스웨덴에 있는 회사에 혹시나 하고 이력서를 보냈다(H) 이건 그냥 재미로…포지션도 완전히 다른데 혹시나 하고 보내보았고 지금까지 아무 답이 없다. D 회사와 기술테스트를 봤는데 구글 독스로 문제를 내고 2시간 안에 전송하라는 조건이었다. 플래시 일반에 대한 문제였는데 실제 업무와 연관은 없어보였지만 겨우겨우 답을 써서 보냈다. 이후 D 회사에서는 면접제의가 왔는데 낮은 연봉을 제안하고 거기에 만족하면 면접을 보러 오라는 조건이었다. 자존심도 상했지만 일단 면접을 보겠다고 답신을 보냈다.

그리고 기분이 많이 우울해졌다. 독일에 블루카드 발급으로 이민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우리나라 뿐 아니라 세계의 인력들이 독일로 몰려들고 있었다. 나같은 10년 이상 경력자 뿐만 아니라 3-5년 경력자 그리고 대부분 싱글에 인도출신 개발자들이 몰리는 통에 블루카드 발급이 허용되는 수준의 연봉에도 만족할 사람들이 많은 것이다. 즉 IT 쪽의 취업 시장은 독일 기업들이 이미 이런 사정을 알고 나와같은 인력은 높은 연봉을 제안하지 않고 낮은 연봉에 오면 좋고 아니면 다른 사람 많다는 식의 입장을 취하는 것이다.

취업도 사업도 답이 아니라면 독일은 나를 환영하지 않는 것일까…? 우리 가족이 여기 살 운명이 아니라는 걸까? 100번 양보해서 영주권 받을 때 까지 저 회사에 다니면서 적자 가계부는 한국에서 벌어놓은 돈으로 메꾸더라도 그 다음은 어떻게 해야 할까..계속 저임금 외국인 노동자로 살아갈지, 그 사이 뭔가 아이템을 개발해 사업을 할지..한국에서 사업을 더 준비해서 다시 나올지…

독일 구직 후기#1 – 독일에 오기까지

어려운 고비를 넘고 이런 후기를 남길 수 있다는 것이 하나의 행복이다. 굳게 닫혀있던 문을 열고 난 뒤의 해방감! 물론 그 뒤에는 또 다른 문들이 있음을 알고 있지만 문 밖의 사람들은 이 과정이 궁금하고 답답하기만 하다. 나 또한 그 방법을 찾고자 노력했던 한 사람으로서 또 다른 나와 같은 사람들이 헛된 시행착오를 겪지 않도록 후기를 남기려고 한다.

이번 구직 활동을 통해 얻은 가장 큰 소득은 직장이라기 보다는 나에 대한 객관적인 시각과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것이었다. 사실 이 두 가지는 인생을 살며 늘 확인하고 있어야 하는데 흘러가며 살다 보면 어지간해서는 알려고 하기 쉽지가 않다. 나는 이번 기회를 통해 나와 가족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었고 나중에는 이러한 고민만으로도 독일에 온 가치가 충분히 만족스럽게 느껴졌다.

시작은 굉장히 무모했다. 독일로 가고싶다는 아주 막연한 생각과 주변 사람들에게 가끔 독일에 가겠다고 말했던 것이 전부였던 우리 가족. 물론 정은(아내)이와 언젠가는 독일에 가자고 합의만 해 놓은 상황이었다. 둘째가 수유를 끊을 무렵..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2년전인 2012년 4월경.. 이제 정말 준비를 해 볼까? 라고 생각하고 바로 1주일정도 뒤에 셋째의 임신소식을 알게 되었다. 부랴부랴 새로운 전셋집을 알아보고 용인 양지로 내려가 12월에 아이를 낳았다. 아이가 둘이 있는데 셋째임신을 했으니 내가 집에서 회사일을 하면서 집안일을 도와도 일은 끝이 없었다. 16키로 세탁기를 1주일에 8-10회를 돌려야 했고, 주택으로 이사를 가는 바람에 마당일 까지 추가가 되었다. 하지만 너무나도 행복한 전원주택 생활을 했으니 그 시간에 대한 후회는 전혀 없다. 너무나 행복한 생활과 좋은 이웃에 반해 그나마 약해있던 독일행 결심이 점점 더 흔들리던 시기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살던 집에 하자가 너무 심해 약속된 2년 전세기간을 다 채우지 못할 상황이 되었는데 우리는 이를 계기로 다른곳으로 이사하지 않고 일단 어디든 해외로 나가서 경험을 해보자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게 바로 2013년 10월 경.. 집주인과 이야기를 끝내고 11월 한 달동안 모든 살림살이를 대처분하였다. 나눠주고 버리고 팔고…4월달에 샀던 그랜드 피아노는 샀던 사람한테 헐값에 다시 넘겼다. 5월달에 산 자동차도 팔았고 우리가 아끼던 모든 물건들을 정리하였다. 그리고 광주의 본가와 서울의 처가에서 얼마씩 지낸 다음 2014년 1월 2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로 출국했다.

이 때에도 독일을 언제 가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다만 겨울은 추우니까 동남아 순회 여행을 하고 괜찮은 곳이 있으면 더 머무르면서 독일에 갈 준비로 영어도 공부하고..뭐 이런 생각이었다. 말레이시아에 한국사람을 통해 한달간 숙소를 구해 여기저기 구경도 하고 맛있는 것도 먹으면서 보냈다. 그리고 2월달 목적지로 발리에 가는것으로 정하고 세 곳의 숙소를 예약했다. 그 다음 목적지는 발리에서 생각하는 것으로 하고.. 발리에서 신나게 놀다가 마지막 숙소에서, 그러니까 10여일을 남기고 독일로 가보자는 결심을 했다. 이 시기만 해도 독일에 지사를 만드는 식으로 사업비자를 받겠다는 생각이었다. 비행기는 프랑크푸르트행인데 우리는 독일의 어느 지역에 머물러야 할지도 정하지 못했다.

에센이나 뮌스터로 가야하나..NRW 창업지원금을 받으려면 이런곳으로 가야하는데 어쩌지..고민을 하다 베를린에 마음이 맞으면 같이 사업을 해볼 수 있을것 같은 사람이 있어서 일단 만나보기로 하고 베를린행 기차표까지 예약을 했다. 마지막 날까지 베를린의 숙소를 알아보다가 발리에서 비행기가 이륙하는 순간 겨우 베를린 숙소를 예약하고 독일로 오게 되었다.

3월의 베를린은 추웠다. 2달을 30도가 넘는 동남아에서 매일 수영하고 지내다가 늦가을 옷 한벌씩만 가지고 독일에 도착한 우리 가족..호야(둘째)는 심지어 신발이 크록스..

25년만에 온 독일은 달라진것 없이 그대로 였다. 베를린에 숙소는 7일간 머물 곳(노이퀠른)과 30일간 머물 곳(트렙타워)을 예약했는데 40여시간에 걸친 대 이동 후 첫 번째 숙소에 도착했을 때 부모님 친구분께서 어떻게 알고 나오셔서 첫 번째 숙소를 취소하고 아주머니 집으로 가게 되었다. 아주머니 집에서 추위를 이길 옷을 조금 사고 여러 이야기를 하다 동업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고 지사설립과 취업을 고민하게 되었다. 7일 후 트렙타워의 숙소로 이동하여 이력서를 적으면서 포트폴리오로 쓸 간단한 게임을 만들었다.

그러면서도 계속 지사설립과 취직하는 것에 대해 갈팡질팡하였는데 취직을 하면 인생이 거꾸로 가는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미 한국에서 사업을 한 시간이 6년이 되어가기 때문에 다시 취직을 한다는 것이 뭔가 인생을 거꾸로 가는건 아닐까 하는 고민..하지만 결국 취직을 하는것이 독일 정착에 가장 빠른 길이라 판단하고 이력서와 포트폴리오 마무리를 열심히 했다. 3월 말, 마무리된 이력서와 포트폴리오를 가지고 처음으로 이력서를 넣었다. 하지만 긴장이 풀렸지 평생 가장 지독한 몸살 감기에 걸려 거의 1주일동안 아파서 누워있게 되었다.

 

베를린에서 시작

우여곡절 끝에 베를린의 게임회사에 입사하게 되었다. 근무 시작일이 6월 1일인데 일요일이라 2일부터 출근하기로 했다.

회사 직원은 120여명인 게임 개발 스튜디오이고 지금까지 2개의 타이틀을 개발하였다. 두 번째 타이틀이 어느 정도 알려진 Spec ops : The line 이라는 게임인데 내가 좋아하는 FPS 장르여서 나 또한 재미있게 즐겼던 경험이 있다(그 때는 이 회사가 그 회사인줄 몰랐지만..). 면접 과정에서 차기작으로 개발하고 있는 프로젝트를 살짝 볼 수 있었는데 재밌어 보였다.

내가 하게 될 업무는 UI 개발 부분이다. 직접적으로 게임을 개발하는 것은 아니지만 게임상의 UI 를 개발하는 것으로 UX 전반적인 부분까지는 아니지만 많은 부분에 대한 해답을 스스로 제시해야 하고 모션에 대한 감각도 중요하다. 게임 회사여서 그렇지 업무만 놓고 보자면 슈투트가르트의 회사와 비슷한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다만 새로운 아이디어나 시도도 중요하지만 최적화와 안정화가 가장 중요한 미션이 될 것이다.

플래시가 죽어가는 마당에 플래시계의 새로운 아이콘으로 떠오르고 있는 스케일폼을 이용하는 것도 매력적이다. 또한 게임 자체가 언리얼엔진을 통해 만들어지기 때문에 회사에서는 언리얼엔진에 대한 스터디를 필요로 한다. 이것 또한 언젠가 공부해 보고 싶었던 부분이고 AAA타이틀을 만드는 게임회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경험할 수 있다는 것도 좋은 일이다. 독일에서 일하고 싶었던 목표인 국제적인 업무 환경은 말할것도 없다.

독어와 영어로 함께 표기된 고용계약서와 각종 계약서를 읽고 사인하고, 독일 취업으로 진로를 바꾸게 만든 바로 그 공보험에 가입 신청도 하고, 회사에서는 블루카드 신청을 위해 베를린 외국인청에 예약을 잡아놓은 상태이다. 또한 내가 최대 2달동안 머물 수 있는 임시 숙소를 찾아주고 있다. 이 임시 숙소에 머물면서 베를린에 살 집을 구해야 하고, 그 곳으로 다시 전입신고를 해야 애들 유치원과 학교를 보낼 수 있다. 집을 찾는 동안 내가 출근을 하기 때문에 정은이가 애들 셋을 데리고 지낼 수 밖에 없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2주 이상은 무리일것 같다. 뭔가 대책을 생각해야 할 것 같다. 본인은 어떻게든 한다고 하는데..

오늘은 2년여만에 정은이와 맥주를 한 잔 같이 마셨다. 시우 임신 사실을 알게 된 이후 처음이다. 이제야 모유수유를 끊었기 때문인데 단 둘이 조용히 마시고 싶었지만 우리 사이에는 애들 셋이 껴 있었다..ㅠㅠ

독일로 이민..매번 말로만 독일 갈꺼야~ 그러면서 이런일 저런일 때문에 계속 미루고 준비도 하지 않고 진짜 가긴 가나..서로 그렇게 생각 했었는데 어느새 이렇게 되어버렸다. 말이 행동의 씨앗이 되었고 두려움도 컸지만 그냥 실천도 해 보았더니 결국 이렇게 이룰 수 있었다. 물론 아주 작은 산을 하나 넘었다고 볼 수 있지만 앞으로 다가올 어려움은 적어도 우리 스스로 노력여하에 따라 결과가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힘들어도 버틸 자신이 있다. 취업에 대한 불확실한 불안감은 지금 당장의 내 노력과 비례해서 결과가 나오지 않기 때문에 굉장히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다.

이제 남은 큰 일을 생각해 보면, 집 구하기, 살림 장만, 학교,유치원 보내기, 온 가족 독어 공부가 될 것 같다. 집도 잘 구할수 있을거야!

2번째 잡 오퍼

가장 우려했던 일이 일어나고야 말았다.

베를린회사에 합격한 상태로 슈투트가르트 회사에 면접을 보았는데 베를린 회사에 가기로 하고서 슈투트가르트에서 연락이 온 것이다. 베를린 회사는 독일 회사답지 않게 일을 굉장히 빨리 처리하고, 슈트트가르트 회사의 면접이 조금 늦게 있어서 타이밍이 맞지 않았다. 둘 다 조건은 비슷했지만 슈투트가르트의 회사가 조금 더 많이 도전하고 배울 수 있는 분야이고, 새롭지만 예전부터 관심있었던 분야였기 때문에 더 아쉬움이 컸고 또 그 회사에 많이 미안했다.

베를린 회사는 1,2차 면접 이후 바로 다음날 오전에 합격여부를 알려주었는데 느낌상 1차 면접에서 좋은 인상을 준 것 같았다. 슈투트가르트는 전화면접후 면접이었는데 내가 전화면접에서 많이 버벅거렸기 때문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면접 기회를 주었고, 면접에서 많은 이야기를 했다. 물론 버벅거렸지만..

베를린의 제안 유효기간이 다 되어서 베를린을 선택했고 바로 다음날 슈투트가르트에서 연락이 왔다. 딱 1주일..일반적인 독일 회사가 고려하는 시간이다. 슈투트가르트의 일은 개발 능력도 중요하고 디자인 센스도 중요하지만 의사소통이 관건이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실전 영어 경력이 한두달 밖에 안되는 내가 이들과 자유롭게 의사소통을 하며 내 의견을 주장하고 서로의 부족한 점을 파고들어 보완할 수 있을까..? 나의 대답은 아직 아니라는 것이다. 어쩌면 아직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다. 분명히 인연이 된다면 다시 만나서 일할 수 있을것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