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화유치원

네이버블로그 – 2004/12/18 23:57

난 숫자나 내 관심밖에 일을 기억하는데는 바보수준이지만,
과거의 기억이나 흥미있었던 일들은 아주 잘 기억하는 편이다.

5살때의 기억은 아주 많이 머리속에 남아있고 4살때의 기억도 생생하게
남아있는 부분이다.

특히 5살때는 여러가지 일들이 많았기 때문에 순간순간을 기억해 내는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내가 정식으로 유치원에 다니게 된것이 5살때였다. 4살때는 형을 따라 가끔 유치원에
따라간 적이 있었다.

내가 다니던 유치원의 이름은 연화유치원이었는데 아직도 유치원에 간 첫날이 기억난다.
노랗고 연두색의 가운을 입고 노란 모자를 쓰고 노란 가방을(크로스백) 메고
유치원 놀이터에서 7명의 친구들과 사진을 찍었다.

아마도 내가 1-2주 정도 늦게 들어가는 그룹이라 그렇게 했었나 보다.
지금 내가 직장에서 조용히 있는것처럼 그 때도 웃기만 하고 조용히 있었던 기억이 난다.
(나중엔 안그러지만)

불교쪽 유치원이었기 때문에 유치원 입구(사실은 절 속이었지만)에는 절이 있었는데
그곳엔 비구니(추정나이 15세)가 있었다. 우리는 이 누나를 귀신으로 불렀는데 아마
불상의 무서운 모습과 향냄새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때 우리는 비둘기호를 타고 교외로 놀러가기도 했고 고구마를 뽑기도 했으며
김장을 담그기도 했었다. 어린이날이나 부처님 오신날 행사때는 사탕으로 만들어진 목걸이가
목에 걸리고 색종이와 도화지로 만든 멋진 왕관이 머리에 씌워졌었다.
노란 가운을 입고 항상 그림을 그리거나 가끔 릴레이 체육대회,씨름을 하기도 했다.

난 그런 일련의 활동들을 무난히 별다른 사고없이 조용히 치루었던것 같은데 내가 유일하게
못하는것이 있었다면 당시 유행했던 제리포를 잘 못먹었다는것이다.

제리포는 기술이 좋아야 한번에 츄릅- 하며 삼킬수 있는데. 나는 그게 잘 안되서 혀로 빨아먹으려다항상 낭패를 보곤 했다.

살다보면 다음에 해야지..하고 남겨둔 부분이 나중에 꼭 문제가 되는 때가 있다.
제리포 먹는법을 형한테 배워나야지…하고 미루던 어느날 유치원에서 다른 반 아이들과
릴레이 대회가 열린것이다.

반환점에는 제리포가 가득있고 우리들은 반환점까지 가서 제리포를 다 먹고 돌아와야 했다.
나는 달리기를 잘하는 편이어서 제리포가 있는곳까지 빨리 갔지만 그놈의 제리포!!!!
도저히 못먹고 게임 진행이 안되어 슬프게 제리포도 다 못먹고 돌아와야 했다.

또 유치원에 가면 친구들은 서로의 장난감을 자랑하기 바빴는데 당시 유행 1위였던 장난감은

자전거 장난감이었다. 뒷바퀴만 쇠로된 조그만 자전거는 두발임에도 불구하고 쇠바퀴의 힘으로
굴리면 휙- 잘굴러가는 그런 장난감이었다.

조잡하기 서울역에 그지없는 장난감이지만 어찌나 가지고 싶던지. 뭔지 잘 생각안나지만
친구가 이빨로 잘근잘근 씹어 핸들이 너덜해진 그 자전거를 나의 무엇인가와 바꿔온 기억이
난다.

또 연화유치원에서 기억나는 일은 어딘가로 놀러가서 하루밤 자고 온 일이다.
이건 내 앨범에 사진도 있어서 더 생생히 기억할 수 있는데, 당시 난 얼굴에 뭐가 많이 나서
부모님을 안타깝게 하던 시절이었다. 이름은 기억안나지만 단짝 친구도 있어서
잘 지냈는데, 밥먹기가 싫어서 괴로워 했던 기억이 난다. 먹기싫은걸 억지로 꾸역꾸역 먹었다.

많은 일이 있었지만 다 쓸 수 없을것 같다.

5살때의 추억들을 생각하니 다른 추억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오른다.

1984년 내가 5살때의 추억들…20년 전의 추억들이 내 뇌세포 어딘가에서 어떤 형태로 저장되어
있다가 그 주위에 어떤 자극을 받아 술술술 흘러나오는 것일까?

내 기억이 시작되는 최초의 시점을 생각해 봐야겠다.
곰곰히…..

내 기억의 시작은 어떤 사건일까?

푸치파칭코 오픈

파칭코 오픈했다.

역시 이름이 있어서 그런지 오픈 20분만에 동접 600을 기록하면서
푸치한게임들중 동접 1위로 올라섰다.

1위 FSPPACNKO : 591
2위 FPBSAME : 504

내가 일본에 와서 만든 게임이 푸치한 1,2위를 다투고 있다.
9-10시가 피크타임이니 파칭코는 1000이상.
세임퍼즐은 800정도 나올것 같다.

테스트 할 때 가장 많이 졸았던 게임인데..
반응이 좋으니 좋네..

앞으로도 쭉 인기가 있었으면 좋겠다.

틈이 없다…

퇴근하고 오면 지친다..
몇시에 들어오든..

자고나면 피로가 풀리지 않는다..
아무리 자도..

내 뒤에 틈이없다..

가장 편한 순간 다음을 대비하자!

배가 지독히 아프고 설사를 하면 제발 배만 안아팠음 좋겠다..
라고 생각한다.

이 세상에서 성공이나 오래살고 싶은 욕심..
돈..이런거 다 부질없다..

그냥 배만 안아프면 좋겠다…이렇게 생각하게 된다.

지금 내가 배가 아프다는게 아니라..
오늘은 몸과 마음이 왠지 편하고 가볍다.
와신상담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인간의 마음은 정말로 간사해서..아무리 큰 충격,후회도
시간이 지나가면 차츰 잊혀지기 마련이다.

와신상담의 의미에서 고통을 되새길 수 있는 사진을 올려봤다.

내가 다쳐서 아팠던 기억 등을 떠올리며..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와신상담.

sylt – 7월21일

* 현실감을 높이기 위해 철자 및 띄어 쓰기는 당시 일기를 그대로 옮깁니다.

일기(기행문) 7.21

아침에 일어나서 버스로 갔다.
막타는데 누나가 왔다.
그래서 버스속에서 예기했는데 말이 안통해서 웃겼다.

버스를 타고 가다보니 재미있는 일이 많았다.
배로 갈아타고 쥘트에 내렸다.
그리고 버스도 갈아탔다.

쥘트의 섬들은 동화속에 나오는 집 갔았다.
지금은 어둡다.

버스에 내려서 자전거를 빼고 숙소로 갔다.
8명이 같이잔다.

또 바다도 갔다. 신발이 젖어 말리고 있다.
지금은 쓰레빠다.
다 빨아서 나뒀다.
그리고 탁구체가 좋다고 한다.
덴마크를 거쳐 버스도 배에 타고 갔다.
저녁밥은 잘먹었다.
지금 애들은 예기하고 있다.
END THE END ENDE

–; 이게 그날의 일기다.
지금 생각해보면 첫날은 버스타고 숙소 배정 받은거 밖에 없었다.
갈때 여행가방을 엄청 무거운걸 가져가서 무거워 죽을뻔했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내 몸만한 가방을 들고간 기억이 난다.

벌써 15년전의 이야기인데…바로 지금처럼 머리속에 떠오른다…

2005년10월16일 담양

감을 따는 아빠

벼가 무르 익었다. 우리 벼는 아니지만..

가을 이라면..

엄마 아빠와 함께 오른 뒷산

집에서 운전해서 30분만 나가면…

가을에 빠질 수 없는 아이템

수많은 물고기 때..사람을 무서워 하지 않는다.

코스모스가 손짓한다는 말의 의미

다리일까..?

소녀시절로 돌아간 엄마.

3주간의 캠프 – Sylt

독일에서의 한 학기가 지나가고 여름방학이 되었다.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내가 독일에 있었던 1년동안 가장 많은 일이 있었던
여름방학..

그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유일하게 내가 일기를 썼던 시간…
유일하게 내가 가족들과 떨어져 긴 시간을 보낸 시간…
말도 통하지 않고 부끄럼도 많았던 내가 다른 사고의 세계에
들어가 있던 시간들…
그리움이 무엇인지 몸으로 느꼈던 시간들이었다.

여름방학이 되어 나와 형을 적응도 시킬겸 엄마아빠는 캠프에
보낼 생각을 하는데..첫 3주는 내가 가고 그 다음 3주는 형이가는..
그런 계획이었다.

내가 캠프에 가 있는 동안 엄마아빠는 형과 유럽 여행을..
그리고 형이 캠프에 가 있는 동안은 내가 엄마아빠와 유럽 여행을
하기로 했다..

난 캠프를 간다는 사실에 너무 들떠있었고..
형은 가기 싫어했다..

나는 나중에 중요한 사실을 또 깨닫게 되는데.. 바로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 것..

마침 배낭여행을 온 서울 큰아빠네 큰누나와 며칠을 보내고
캠프를 떠나는 날이 되었다.

자기 자전거를 가져가야 하기 때문에 중고 자전거도 200마르크를
주고 구입했다.(20마르크였던가?–;)
애들한테는 잘 어울리지 않는 빨간 아줌마 자전거여서 조금 불만
이었지만… 캠프를 떠난다는 설레임이라니..!

앞으로 어떤 일들이 일어날지도 모르고 나는 떠나게 된다.
내가 갈 곳은 쥘트(Sylt).
독일에서도 대표적인 휴양지로 꼽히는 섬이다.

독일보다는 덴마크의 바로 옆에 있지만 독일에 포함되어 있다.
마치 발레리나가 춤을 추는 모습같은 쥘트.
육지와 철로로 연결되어 있다.

내 어린시절의 가장 큰 경험이 시작된다.

立花隆 – 타치바나 다카시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일본인’ 스러운 타치바나 타카시의
책을 모두 구입했다.(구할 수 있는건..)

뇌를 단련하다.
청춘 표류.
도쿄대생은 바보가 되었는가.
나는 이런책을 읽어왔다.
랜덤함 세계를 탐구한다.
21세기 지의 도전.

또..뭐가 있었는데..

어려서 부터 일본에 대해. 일본인에 느껴왔던 단편적인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그 느낌이 극대화 된 사람이
타치바나 타카시 이다.

내가 보고 듣고 느낀 일본과 타치바나 타카시를 키워드로
일본을 이해하려 한다.

인맥,인간관계

인맥을 위해..인간관계를 위해 억지로 노력하는 사람이 있다.
나도 그랬던 적이 있었다.
모두에게 잘해줘야 하고 부탁은 거절하지 못하고 상대방 기분에만
맞출려고 그러고…

아주 큰 착각을 했었던것 같다.
나와 맞지 않는 사람과 억지로 끼워맞추다가는 인간관계는 커녕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업무적인 관계에서야 물론 업무적인 태도로 임할 수 있지만..
대학생활 중 내가 어거지로 넓힌 인간관계 중 대부분은 정리했지만
억지 쓰지 않아도 내가 좋아하고 신뢰하는 사람들은 인간관계가
더욱 돈독해 지기 마련이다.

중학교 이후 얼굴 한번도 안본 친구도 가끔 연락하고..
중고등학교 시절 가장 친했던 친구들은 몇년만에 한번씩 만나지만
그 느낌 그대로다..

카페활동을 하다 만난 좋은 사람들도 여전히 그때의 이미지대로
남아있다..

내 행동을 제외하고 그 사람들이 처음부터 자신들의 진심을 나에게
보여줬기 때문이다..
무작정 나한테 잘해줄려고만 했다면 지금쯤 많이 실망을 했겠지..

나도 마찬가지다..억지로 하면 안된다..
내가 싫은 사람과 같이 일은 할 수 있지만 그 이상을 절대 힘들다..
다행히 내 주변에는 좋은 사람들이 너무 많다..
몸둘바를 모를 정도로…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고..
언젠가 내가 뭔가 대박이 나면 꼭 그 영광을 내 주변의 정말
좋은 사람에게 돌려야지..

내가 싫어하고 꼴보기 싫어하는 사람 중 하나는 자기가 필요할때만
찾는 사람이다..

내가 무슨 고객만족 서비스 센터나 되는 것 처럼.

하지만 내 성격도 많이 바뀌었다.
일방적인 인간관계는 없다..
계산적인 인간관계도 없다..

언제나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보여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