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민과 나

언제나 용기가 없었다.

지금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선택할 용기말이다.
될대로 되라지..하면서 그렇게 안되게 하려고 엄청난 노력을 했다.

나도 그렇지만 다들 참 웃기는 인생들이다..

Running

2004/10/21 18:12 – 네이버 블로그

나한테는 위로 형이 있다.
아들만 둘. 우리 형제는 달리기를 무척 잘한다(지금도?)

형은 조금 더 잘달려서(같은 나이의 나와 달렸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중학교때까진 선수생활도 했다.

그런 나와 형이 같은 고등학교를 다녔는데 내가 1학년 형이 3학년 이었다.

봄에 열리는 체육대회..
나는 100m 200m 400계주 멀리뛰기 에서 이미 4관왕을 차지한 상태..
형은 고3이라 (당시는 공부에 열중하고 있었다) 400계주만 출전하기로 했다.

1,2학년 400계주가 끝나고 운동회의 마지막 순서인 3학년 400계주가 시작되었다.

형은 마지막 주자.. 두두두 사람들이 달린다. 형 반은 꼴등이다.
마지막 주자의 차례가 되었다. 이미 선두주자는 반바퀴 이상 차이..

마지막 주자는 한바퀴 반을 돌기때문에 아직 한바퀴가 남아있었다.

형은 정말 바람처럼 달렸다. 사람이 지나가면 발에 차인 모래만 머물렀다.
선두가 자만해서 허허 거리면서 뛴것도 있었지만 결국 형은 1등으로 들어오고야 말았다.

‘와!!!!~~!!!’

전교생이 주목하는 그 순간의 모습이란..

형이 졸업한 이후로도 난 꾸준히 1등을 했지만 그때와 같은 감동 (모두가 공감하는) 은일으켜본 적이 없다.

지금의 나는 배도 좀 나오고 무릎관절 수술에 꾸준히 하는 운동없이 많은 시간이 지나
나에게 주어졌던 유일한 재능인 ‘달리기’를 더이상 나만의 재능,특기라고 말할 수 없지만
언젠가..빠른 시간안으로 내 노력으로 이루어진 또다른 재능으로
많은 사람을 감동시킬 꺼리를 만들고 싶다.

유성

2004/08/20 12:01 – 네이버 블로그에서..

얼마전 화려한 우주쇼라고 해서 유성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지금 우리집은 시골중에 시골이라 별이 많이 보여서 엄마랑 둘이 유성구경이나
해볼까 하고 집밖으로 나갔다.

가로등도 없는 논길로 갈려고 도로를 건너는 순간 믿기힘들정도로 큰 유성이
떨어지는걸 봤다.

“우르르르르르르 콰콰쾅~~~”

뭔가 이런소리가 나야할 규모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너무나 조용히..
그리고 빨리 더구나 멋진 초록색 불타는 꼬리를 남기고 사라졌다..

엄마와 난 경악했다.

사실 이런 유성을 본건 이번이 두번째이다.
때는 바야흐로 1990년..(맞나?) 국민학교 4학년 겨울방학 직전이었다.

1년간의 독일 생활을 위해 광주공항에서 서울김포로 비행기를 타기위해
막 광주공항에 도착했을때였다.

처음 비행기를 탄다는 설레임과 외국에 간다는 설레임(사실 첨은 아니지만 기억에 없으므로)
으로 너무너무 흥분해 있었다.

공항 청사를 들어가는 순간 나와 형은 약속이나 한듯 하늘을 보게 되었는데..

마침 지나가는 정말 거대한 물체..노란 불꽃꼬리를 태우며 무섭게도 조용히 1-2초정도
(사실 더 짧았겠지만 느낌상..) 머리위로 지나갔다.

당시 유행하던 축구소년 용소야 시리즈를 보며 축구선수가 되어야 겠다는 꿈을
꿀정도로 순진무구했던 형제는 급기야 그것을 UFO로 착각하고…

가벼운 소동을 벌리고서야 진정했는데..

그게 유성이라는걸 알게된건 그로부터 5년도 지난 후일것이다.

그나저나 그당시 용소야 시리즈는 대단했는데..
나중에 당구 시리즈도 나온걸로 안다..

지금생각해보니 일본 만화인거 같은데 항상 만화책에는 글그림 전성기
라고 쓰여있었다.

진실일까..?

행복

모두 행복해지기 위해 열심히 노력한다.

중학교 때 “앞으로 6년만 고생하면 60살까지 편히 산다.”
고등학교 때 “3년만 고생하면 평생 편히 산다.”
고3때 “1년만..”
대학교때 “4년만..”
군대가서 “2년만..”
직장가서 “결혼하기 전까지만..”
결혼해서 “애 낳기전까지만..”
애 낳아서 “애 다 클때까지만..”
애 다 커서 “결혼할때 까지만..”
.
.
.

결국 행복을 위해 노력하지만 영원히 행복해 질 수 없다.
불행하다는것은 아니다.
하지만 ‘더’ 행복해 질수는 없다.
왜냐면 내일은 오늘보다 행복할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누군가는 이 느낌을 ‘희망’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희망은 다르다.
희망은 내일은 오늘보다 더 행복하겠지. 라고 생각하는것이다.

내일은 오늘보다 행복할것이다.
내일은 오늘보다 더 행복하겠지.

이 두 문장의 차이를 느끼지 못한다면 벌써 행복하지 않을
준비가 되어있는것이다.

바꿔서 생각해 보면, 우리가 내일을 위해 엄청나게 노력하고
희생하는 오늘은 바로 어제,혹은 수년전 오늘과 똑같은 생각으로
희생했던 어제,수년전의 결과물이다.

한달에 100만원을 벌고 100만원을 쓰는 A와 B라는 사람이 있다.
A와 B는 카드를 만들었는데 A는 첫달에 200만원을 지출했다.
B는 100만원을 지출했다.

그후로 두명의 지출을 매달 같았지만 A는 언제나 빚을 지고 살아야
했다. 아무런 여유도 없이..B는 언제나 여유가 있었다.

정말 작은 욕심이, 그리고 작은 포기가 아주 다른 결과를 가져온다.
한번의 기다림과 여유가 나를 영원히 여유롭게 만들어 줄것이다.

세상에는 잘난사람,잘나고 싶은 사람, 잘난 척하는 사람 투성이다.
과연 이사람들..이 많은 잘난 사람들은 정말 행복할까?

나도 문득문득 이런 기분에 휩쓸리기도 하고 한곳만 바라보며
욕심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행복은 ‘무엇’이후에 오는것이
아니다.

이렇게 써놓고도 사실 마음은 조금 다르지만 역시나 확실히
이야기 할 수 있는것은

오늘 행복하지 않으면 내일도 행복하지 않다. 라는 것이다.

심은하의 1등 신랑

뉴스에 나온걸 대강 요약해 보면 이렇다.

현재 한국건설기술연구원 기술정책연구그룹장 선임연구원.
연세대 토목공학과 출신.
1997년 동경대학교 공학계 연구과 객원연구원.
현재 연세대학교 국제대학원 연구교수.
2003년 과학의 날 국무총리상을 수상.
‘스탠포드대 연구원 지상욱, 약한 신체 부위를 웨이트 트레이닝으로 강화시켰다’라는 제목으로 ‘남자 몸만들기 4주혁명’(한동길 지음·랜덤하우스 중앙 출판)의 사례 모델.

지덕체를 겸비한 1등신랑이라고 모든 포털사이트에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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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올해 41살이다.(한국나이)

추석 소원

달을 보고 왔다.

일본에서 보는 한가위 달도 한국에서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달님에게 비는 소원은 최근 거의 비슷한 소원들이지만
왠지 빌지 않으면 안될거 같아 또 빌고 왔다.

작년엔 집 마당에서 삼각대로 달님을 찍었었는데..
올해는 미우니 안찍어야 겠다.

내가 소원이 많아서 안들어주는건가..

버터치즈계란말이

먹고 보니 사진찍는걸 깜빡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 계란..
혼자 있다보니 해먹을 음식 재료를 사다 놓으면 한번 해먹고 남은건
다 버리기 때문에 조금 부담이 된다.

그렇다고 맨날 사먹을 수도 없고..

가장 간편하게 요리해 먹을 수 있는게 계란이라 계란을 자주 먹는데
일본에 와서 인상 깊었던 카스테라 계란말이에 도전해 보기로 했다.

그런데 만드는 방법을 모르니..

그냥 계란 말이라도 해먹기로 결심하고 무려 4개의 계란을 풀었다.
(계란이 작아서..오늘 먹어보니 작은 계란으로 3개면 충분할듯)

팬을 달구고 기름을 두르고 버터도 둘렀다~
힝..계란요리할때 팬에 두르는 버터 냄새는 넘 좋아..

계란 말이는 첫 시도였는데..
의외로 쉬웠다.

계란이 좀 익어서 밑부분이 형체를 갖추었을때 냉장고에 굴러다니던
치즈를 넣었다. 그담엔 젓가락으로 슬슬 말아주면 그것이 계란 말이.

다음엔 달착지근하면서도 카스테라 맛이나는 일본 계란 말이에
도전해야겠다.(다시마도 들고왔으니!)

의외로 치즈의 맛이 좋았다…

요리 잘하고 싶다.
잘하고 싶은게 많다..
피아노도 잘치고…아니 치고 싶다.
돈도 많이 벌고 싶다.

하지만 마음만으론 안되겠지..
열심히 해야지..

다들 어떻게 살고 있나요?

샤워시간은 길다.

빨리 하면 10분..
멍…하니 하면 30분 이상을 샤워한다.

난 매일 샤워를 2번 하는데..

아침에 일어나자 마자.
그리고 집에 들어와서..

문제는 아침에 일어나자 마자다..

잠이 덜 깬것도 아닌데..

맨 먼저 면도를 한다.
전기면도기라 물기가 있음 아프기 때문에 물을 묻히기 전에
해야 한다.

그런데 꼭 까먹을 때가 있다.

다음 물을 틀고 샤워를 한다.
비누칠하고 샴푸하고..

..어? 내가 비누칠을 했던가..다시 비누칠한다..
비누칠 하다 보면 샴푸한걸 까먹는다.
다시 손에 샴푸를 짜고 머리에 묻힌다음 기억해 낸다..

아..아까 했었지..

그렇게 아침에 샴푸2번 비누칠 2번 하고 출근하게되는데..

꼭 젤을 바르면 스킨로션을 안바르고 스킨로션을 바르면 젤을
안바른다..

이모든걸 다 챙기고 나면 지하철 정기권을 두고 나오거나
회사 카드키를 안가지고 나오게 된다..

참 힘든 세상이다..

나뭇잎사건

내가 운암동 주공아파트에 이사왔을때이고.
내가 잠시 유치원 휴학중이었을때니..6살때로 기억된다.
(난 5살과 7살때 유치원을 1년씩 다녔다.)

때는 1985년 계절은 잘모르겠다.
6살 꼬맹이가 집에서 뭘하겠는가..

매일 엄마 집안일하는거 쫓아다니면서 힘들게 하고..
자고..먹고..자고..혼자 집앞 놀이터에서 흙장난하고–;;
때로 엄마와 함께 시장에 가기도 하였는데..

문제의 그날이었다.

엄마는 무엇을 사러간다는 목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변에 싼 물건이
많이 보이면 이곳저곳 많이 들려서 가는 스타일이다.
콩나물을 살려고 콩나물 파는 할머니를 찾아가는데..
아휴..왜이리 이곳저곳 많이 들리는지..
당시 엄마 발걸음은 무척 빨랐고 또 짧은 내 다리로는(당시 6세) 엄마의 걸음을 따라가기
무척 힘들었다.

그런 나를 엄마는 시장바구니끌듯 이리저리 휙휙 끌고 다니기 일수였고 난 아픈다리와
어린마음에 울음을 터뜨리기 일수였다.

그렇지 않아도 어린시절의 장난으로 콧물이 잘 나오던 그때..(요이야긴 나중에..)
징징울기까지 했으니 콧물이 줄줄 흐르는건 우째야 하나..
소매로 쓱 닦고 또 닦아 봤지만 더이상 닦을수도 없다..

할수없이..

‘엄마 휴지 ㅠㅠ’

이렇게 엄마를 불렀다.
엄마는 나를 쓱 보시더니..이름모를 조그만 나무앞에 섰다..
나뭇잎은 무척 컷던 그 나무.
길가에 있어서 누런 흙먼지를 가득 뒤짚어쓰고있던 그 나무.

설마..

했지만 엄마는 나뭇잎을 따다가 내 코에 대고 ‘흥~~~’ 이라고 말씀하셨다.

흑흑흑

명색이 외국물도 좀 먹고..(생후 3개월까지) 비행기도 타봤던(생후 8개월) 나인데…
여기서 무너지는구나..
그래도 나는 팽~~코를 풀었고 눈물을 닦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
.

가끔 가족이 산책을 갈때 콧물이 나올려치면 난 엄마손을 놓고 아빠한테 달려간다.

‘아빠 코~’

라고 하면 아빠는 멋진 향기가 나는 따뜻한 손수건을 주머니에서 빼서 줬기때문이다.

손수건과 나뭇잎–;;

이 극복할수 없는 차이때문에 잠시 엄마를 미워한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시절 엄마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지금은 10%정도 이해하기 때문에
너무너무 감사할따름이다..

미국과 일본

국민학교 5학년때 독일에 1년간 살 기회가 있었다.
어린시절이었지만 독일이라는 나라에서. 말도 통하지 않는 어린꼬마가
속으로 생각할 시간이 많아지는건 당연해서인지 당시의 일들중에는
기억나는 일들이 무척 많다.

내가 살았던 곳은 게스테 하우스(guest house)라고 외국인 초청,교환 교수들이
잠시 머무는 곳이었다.

독일 사람은 전혀 없지만 대부분 다른나라 사람들(인도,미국 등)이 살았는데..
우리가 이사오고 얼마되지 않아 일본과 미국 사람이 들어왔다.

일본 사람은 딸둘(당시 나보다 조금 어린걸로 기억)
미국 사람은 아들하나 딸하나 인거 같다.

일본 사람은 같은 동양인인 우리와 친하게 지내려거 많이 노력한거 같다.
자기 집에도 초대하고..명함도 주고받고.(나중에 한국에 와서도 엽서를 받을 정도였으니..)
그리고 일본사람은 정말 매사에 인사…예의..
남에게 피해주지 않으려는 노력을 행동하나하나에서 볼 수 있었다.
아이들은 어른들 이야기하는자리에서 입도 열지 않았고..그나이 또래가 대부분 하는 투정이라던가
짜증없이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리고 복도나 밖에서 그 아이들이 시끄럽게 놀거나(거의 보이지 않았다)하는 경우는 없었다.

반면..

미국 사람은 자기들끼리도 잘 놀았거니와 전혀 남을 개의치 않았다. 나보다 조금 어린거 같았던
아들놈은 나를 몇번 보더니 나랑 놀고 싶어했다. 중요한건 그놈이 영어로 당연하다는듯이
하는 말들이었다. 영어든 독어든 내가 못알아 듣는건 마찬가지라 상관없지만 나는 왜 그놈한테
내가 하고 싶은 말들은 독어로 해야한다고 생각했으며 말을 못하면 한국말로라도 해야할
생각을 안했는지 모르겠다.

미국 사람들은 일본사람들과 정확히 반대였다.

나는 미국 사람 아들놈하고 갖은 사고는 다 치고 다녔다. 지하주차장이 자동으로 닫히는데
그 틀을 타서 속에 들어가 보기도 하고 좁은 건물 벽에 다리를 걸치고 위험스럼게 3층까지
기어올라가기도 했다. 꼭대기 층 바로 밑에 사는 미국사람집 창문으로(지붕에 창문이 있었다)
공을 골인시킬려고 공을 뻥뻥 차다가 다른 집 사람들로 부터 미친놈 소리도 들었다.

말은 안통했지만–; 그러던 어느날 이놈이 나를 자기집으로 데려갔는데.
역시 그 아버지나 나한테 영어로 이야기를 하며 체스나 한판둘까? 라고 말하기도 했다.
(알아듣진 못하고 체스판을 내오길래 그런줄 알았다)

그후에 이사람들이 떠날때까지 언제나 이런 모습이었는데..일본사람들은 눈에 거의 보이지
않았고. 미국 사람들은 어디에서나 눈에 보였다.

맨 위층에는 게스테 하우스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이용하는 휴게실이 있는데 이곳에 30여개정도
되는 쇼파가 있다. 이 쇼파는 매트리스처럼 침대로 변신하는 쇼파인데 나랑 우리형은 이 쇼파를
가지고 가끔 집짓기 놀이를 하고 놀았다(터널도 만들고..)
어느날 꼭대기 층에 올라가보니..어마어마한 규모의 쇼파집(?)이 완성되어 있었다.

그곳에 있는 모든 쇼파를 분해해서 꼭대기 층 전부를 덮어버린 집이었는데..
놀랍게도 그 집은 미국인 아빠가 만든것이었다-_-;
그리고 우리가 보는 앞에서 그집으로 다이빙해서 모두 무너뜨려버렸다. 그 미국인 교수가…
미국과 일본이 세계 강대국1,2위로 알고있었던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조용한 나라 일본. 언제나 시끄럽고 눈에 뛰는 나라 미국.

일본과 미국은 1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그렇게 세계를 움직이고 있다.
국민성이라는건 정말 존재하는것이고 이 공통된 기질이 어디서 부터 나오는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국민성이 그 나라의 경쟁력을 결정하는 것임은 분명한 것 같다.

나는 가끔 내가 한국인임을 부정할때가 있다.
한국인의 부끄러운 모습을 볼때.
하지만 다른 나라 사람들이 우리를 볼때는 내가 그들을 그렇게 보듯이 우리의 국민성으로
나를 볼것이 분명하다.

또 내가 그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것도 분명할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