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워시간은 길다.

빨리 하면 10분..
멍…하니 하면 30분 이상을 샤워한다.

난 매일 샤워를 2번 하는데..

아침에 일어나자 마자.
그리고 집에 들어와서..

문제는 아침에 일어나자 마자다..

잠이 덜 깬것도 아닌데..

맨 먼저 면도를 한다.
전기면도기라 물기가 있음 아프기 때문에 물을 묻히기 전에
해야 한다.

그런데 꼭 까먹을 때가 있다.

다음 물을 틀고 샤워를 한다.
비누칠하고 샴푸하고..

..어? 내가 비누칠을 했던가..다시 비누칠한다..
비누칠 하다 보면 샴푸한걸 까먹는다.
다시 손에 샴푸를 짜고 머리에 묻힌다음 기억해 낸다..

아..아까 했었지..

그렇게 아침에 샴푸2번 비누칠 2번 하고 출근하게되는데..

꼭 젤을 바르면 스킨로션을 안바르고 스킨로션을 바르면 젤을
안바른다..

이모든걸 다 챙기고 나면 지하철 정기권을 두고 나오거나
회사 카드키를 안가지고 나오게 된다..

참 힘든 세상이다..

나뭇잎사건

내가 운암동 주공아파트에 이사왔을때이고.
내가 잠시 유치원 휴학중이었을때니..6살때로 기억된다.
(난 5살과 7살때 유치원을 1년씩 다녔다.)

때는 1985년 계절은 잘모르겠다.
6살 꼬맹이가 집에서 뭘하겠는가..

매일 엄마 집안일하는거 쫓아다니면서 힘들게 하고..
자고..먹고..자고..혼자 집앞 놀이터에서 흙장난하고–;;
때로 엄마와 함께 시장에 가기도 하였는데..

문제의 그날이었다.

엄마는 무엇을 사러간다는 목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변에 싼 물건이
많이 보이면 이곳저곳 많이 들려서 가는 스타일이다.
콩나물을 살려고 콩나물 파는 할머니를 찾아가는데..
아휴..왜이리 이곳저곳 많이 들리는지..
당시 엄마 발걸음은 무척 빨랐고 또 짧은 내 다리로는(당시 6세) 엄마의 걸음을 따라가기
무척 힘들었다.

그런 나를 엄마는 시장바구니끌듯 이리저리 휙휙 끌고 다니기 일수였고 난 아픈다리와
어린마음에 울음을 터뜨리기 일수였다.

그렇지 않아도 어린시절의 장난으로 콧물이 잘 나오던 그때..(요이야긴 나중에..)
징징울기까지 했으니 콧물이 줄줄 흐르는건 우째야 하나..
소매로 쓱 닦고 또 닦아 봤지만 더이상 닦을수도 없다..

할수없이..

‘엄마 휴지 ㅠㅠ’

이렇게 엄마를 불렀다.
엄마는 나를 쓱 보시더니..이름모를 조그만 나무앞에 섰다..
나뭇잎은 무척 컷던 그 나무.
길가에 있어서 누런 흙먼지를 가득 뒤짚어쓰고있던 그 나무.

설마..

했지만 엄마는 나뭇잎을 따다가 내 코에 대고 ‘흥~~~’ 이라고 말씀하셨다.

흑흑흑

명색이 외국물도 좀 먹고..(생후 3개월까지) 비행기도 타봤던(생후 8개월) 나인데…
여기서 무너지는구나..
그래도 나는 팽~~코를 풀었고 눈물을 닦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
.

가끔 가족이 산책을 갈때 콧물이 나올려치면 난 엄마손을 놓고 아빠한테 달려간다.

‘아빠 코~’

라고 하면 아빠는 멋진 향기가 나는 따뜻한 손수건을 주머니에서 빼서 줬기때문이다.

손수건과 나뭇잎–;;

이 극복할수 없는 차이때문에 잠시 엄마를 미워한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시절 엄마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지금은 10%정도 이해하기 때문에
너무너무 감사할따름이다..

미국과 일본

국민학교 5학년때 독일에 1년간 살 기회가 있었다.
어린시절이었지만 독일이라는 나라에서. 말도 통하지 않는 어린꼬마가
속으로 생각할 시간이 많아지는건 당연해서인지 당시의 일들중에는
기억나는 일들이 무척 많다.

내가 살았던 곳은 게스테 하우스(guest house)라고 외국인 초청,교환 교수들이
잠시 머무는 곳이었다.

독일 사람은 전혀 없지만 대부분 다른나라 사람들(인도,미국 등)이 살았는데..
우리가 이사오고 얼마되지 않아 일본과 미국 사람이 들어왔다.

일본 사람은 딸둘(당시 나보다 조금 어린걸로 기억)
미국 사람은 아들하나 딸하나 인거 같다.

일본 사람은 같은 동양인인 우리와 친하게 지내려거 많이 노력한거 같다.
자기 집에도 초대하고..명함도 주고받고.(나중에 한국에 와서도 엽서를 받을 정도였으니..)
그리고 일본사람은 정말 매사에 인사…예의..
남에게 피해주지 않으려는 노력을 행동하나하나에서 볼 수 있었다.
아이들은 어른들 이야기하는자리에서 입도 열지 않았고..그나이 또래가 대부분 하는 투정이라던가
짜증없이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리고 복도나 밖에서 그 아이들이 시끄럽게 놀거나(거의 보이지 않았다)하는 경우는 없었다.

반면..

미국 사람은 자기들끼리도 잘 놀았거니와 전혀 남을 개의치 않았다. 나보다 조금 어린거 같았던
아들놈은 나를 몇번 보더니 나랑 놀고 싶어했다. 중요한건 그놈이 영어로 당연하다는듯이
하는 말들이었다. 영어든 독어든 내가 못알아 듣는건 마찬가지라 상관없지만 나는 왜 그놈한테
내가 하고 싶은 말들은 독어로 해야한다고 생각했으며 말을 못하면 한국말로라도 해야할
생각을 안했는지 모르겠다.

미국 사람들은 일본사람들과 정확히 반대였다.

나는 미국 사람 아들놈하고 갖은 사고는 다 치고 다녔다. 지하주차장이 자동으로 닫히는데
그 틀을 타서 속에 들어가 보기도 하고 좁은 건물 벽에 다리를 걸치고 위험스럼게 3층까지
기어올라가기도 했다. 꼭대기 층 바로 밑에 사는 미국사람집 창문으로(지붕에 창문이 있었다)
공을 골인시킬려고 공을 뻥뻥 차다가 다른 집 사람들로 부터 미친놈 소리도 들었다.

말은 안통했지만–; 그러던 어느날 이놈이 나를 자기집으로 데려갔는데.
역시 그 아버지나 나한테 영어로 이야기를 하며 체스나 한판둘까? 라고 말하기도 했다.
(알아듣진 못하고 체스판을 내오길래 그런줄 알았다)

그후에 이사람들이 떠날때까지 언제나 이런 모습이었는데..일본사람들은 눈에 거의 보이지
않았고. 미국 사람들은 어디에서나 눈에 보였다.

맨 위층에는 게스테 하우스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이용하는 휴게실이 있는데 이곳에 30여개정도
되는 쇼파가 있다. 이 쇼파는 매트리스처럼 침대로 변신하는 쇼파인데 나랑 우리형은 이 쇼파를
가지고 가끔 집짓기 놀이를 하고 놀았다(터널도 만들고..)
어느날 꼭대기 층에 올라가보니..어마어마한 규모의 쇼파집(?)이 완성되어 있었다.

그곳에 있는 모든 쇼파를 분해해서 꼭대기 층 전부를 덮어버린 집이었는데..
놀랍게도 그 집은 미국인 아빠가 만든것이었다-_-;
그리고 우리가 보는 앞에서 그집으로 다이빙해서 모두 무너뜨려버렸다. 그 미국인 교수가…
미국과 일본이 세계 강대국1,2위로 알고있었던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조용한 나라 일본. 언제나 시끄럽고 눈에 뛰는 나라 미국.

일본과 미국은 1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그렇게 세계를 움직이고 있다.
국민성이라는건 정말 존재하는것이고 이 공통된 기질이 어디서 부터 나오는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국민성이 그 나라의 경쟁력을 결정하는 것임은 분명한 것 같다.

나는 가끔 내가 한국인임을 부정할때가 있다.
한국인의 부끄러운 모습을 볼때.
하지만 다른 나라 사람들이 우리를 볼때는 내가 그들을 그렇게 보듯이 우리의 국민성으로
나를 볼것이 분명하다.

또 내가 그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것도 분명할것 같다.

어릴적엔 그림을 보면..

엄마가 동화책을 읽어주던 때가 있었다.

내가 4-5살때쯤..형이 학교다니기 전이니까..

엄마가 읽어주는 동화에 취해있다가..
그림이 나오는 면을 보게되면 그 그림으로 빠져버릴때가
있었다. 사소한 점 하나라도 나에겐 큰 의미로 다가왔었다.

캐릭터의 눈이 향하는 방향에서..그림자를 표현하기 위한
사선들도 나에겐 하나하나의 의미였다.

동화는 그때부터 시작이다. 나만의 동화가 시작되는것이다.
주인공은 바뀌고 엄마의 책읽어주는 소리는 더이상
들리지 않는다. 빨리 다음장을 넘겨 다른 그림이 나타나길
기다릴 뿐이다.

상상의 속도는 의외로 빨라 엄마가 한페이지를 다 읽기도
전에 모든 상상을 다끝내고 다음페이지에 나올 그림을
또 상상하며 거기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그 속도란 이미 한페이지에서 책 한권을 다읽은것 같은
어떤 감정에 충실함을 받을 정도였다.

페이지는 넘어가고 내가 상상해놓은 몇가지의 이야기들과
새로나온 그림을 맞춰보기 시작한다. 대부분 맞는 경우가
없어 그 페이지부터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하게 되지만,
때로 내 상상과 그림이 맞아 떨어질때 나는 내가 어떤
천재 어린이라도 되는양 씩 웃으며 엄마를 한번 바라보았다.

그럴때쯤이면 엄마도 꾸벅 꾸벅 졸때쯤이고 형은 이미
꿈나라로 가버린 뒤였다.

내 상상과 공상은 아마도 이때부터 시작된것 같다.

아빠와의 추억

아버지…아빠와의 많은 추억이 있지만..

오늘 문득 생각나는건..어느 초등학교 방학중 개학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때 있었던 일입니다.

밀린 방학숙제를 해결하기위해 개학을 얼마 남기지 않고 수수깡을
사기위해 마침 집에서 쉬고 계시던 아빠와 함께 문방구에 다녀오는
길이었습니다.

집에오는 길이 반쯤 지났을까..

성격급하고 호기심 많던 저는 그 시간을 참지 못하고 수수깡 봉지를
뜯었습니다.

그때 봉지에 박혀있던 호치키스 핀이 손가락에 그만 박혀버렸습니다.
지금 생각하면그렇게 큰 부상은 아니지만(후에 저희 형제는 너무나
많이 다쳐서 부모님 걱정을 많이 시켜드렸습니다..특히 형–;)
아빠는 크게 놀라시며 피를 뚝뚝 흘리는 제 손가락을 입에 가져가셨습니다.
피를 빠는(–;;) 아빠를 보며 내심 속으로 놀란건 아빠의 입속이 정말
따뜻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 어린 나이에 느껴지는 아버지라는
존재감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독이 있을지도 몰라서 였다는 아빠의 설명을 들으며 글썽이던 눈물은
쏙 들어갔지만 아빠의 걱정스런 눈빛과 따뜻했던 입속이 생각납니다.

언제나 옆에있어 더욱 소흘해 지기 쉬운 가족들..
이지만 서로가 서로의 역할을 인식하고 또 느낀다면..
정말 가족의 따뜻함은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인것 같습니다.

라고 언젠가 아빠 홈페이지에 썼더군요..

아부지와 대화

MSN에 형이 접속하길래 형인줄 알았는데
아빠였다.

아빠 노트북에 형 메신저 아이디가 저장되어있어서
가끔 아빠가 로그인 하는데..

어린시절 나한테 워드프로세서(장원)를 가르쳐 주고
매킨토시를 보여주고(대략1987년)
소코반게임과 인디아나 존스 슈퍼맨 게임을 선물해 주던
아빠.

[#M_ 대화내용보기.. | 닫기.. |

4D4954-one_b+one_g 님의 말:
호철아 잘 있니?

송호철|宋虎哲 님의 말:
–;

4D4954-one_b+one_g 님의 말:
아빠다

송호철|宋虎哲 님의 말:
아빠야?

송호철|宋虎哲 님의 말:

4D4954-one_b+one_g 님의 말:

송호철|宋虎哲 님의 말:
잘있어요~

4D4954-one_b+one_g 님의 말:
집앞 논에 흙들였다

송호철|宋虎哲 님의 말:

송호철|宋虎哲 님의 말:
들었어~

4D4954-one_b+one_g 님의 말:
줄을 번 했지

4D4954-one_b+one_g 님의 말:
죽을 번 했지

송호철|宋虎哲 님의 말:
^^

송호철|宋虎哲 님의 말:
거기다 이거저거 심을려면 또 힘들겠네~

4D4954-one_b+one_g 님의 말:
지금 형도 나와 있닌?

송호철|宋虎哲 님의 말:
형은 내일 와?

4D4954-one_b+one_g 님의 말:
어디 갔는데?

송호철|宋虎哲 님의 말:
?

송호철|宋虎哲 님의 말:
형이 나와있다니?

송호철|宋虎哲 님의 말:
추석이라서 안내려가?

4D4954-one_b+one_g 님의 말:
추석날 일찍 내려온데

송호철|宋虎哲 님의 말:

4D4954-one_b+one_g 님의 말:
너 이제가지 누구와 대화했니?

송호철|宋虎哲 님의 말:
형이 없었는데

송호철|宋虎哲 님의 말:
아빠가 들어와서

송호철|宋虎哲 님의 말:
형인줄 알고 말한거지

4D4954-one_b+one_g 님의 말:

송호철|宋虎哲 님의 말:
형은 내일 오냐는 말은

송호철|宋虎哲 님의 말:
내일 형이 집으로 오냐고

4D4954-one_b+one_g 님의 말:
내가 컴퓨터 켜니 네가 나왔어

송호철|宋虎哲 님의 말:
아빠한테 물어본거고–;;

송호철|宋虎哲 님의 말:
ㅋㅋ

송호철|宋虎哲 님의 말:
그게 아니고 메신저라고

4D4954-one_b+one_g 님의 말:
오케이

송호철|宋虎哲 님의 말:
그 프로그램이 자동으로 실행된거야

4D4954-one_b+one_g 님의 말:
알았어

송호철|宋虎哲 님의 말:
아마 형 아이디가 자동으로 저장되어있었던거겠지

4D4954-one_b+one_g 님의 말:
퇴근 하니?

송호철|宋虎哲 님의 말:
7시에 하는데

송호철|宋虎哲 님의 말:
요즘 일도 많고

송호철|宋虎哲 님의 말:
집에가면 공부도 안되고 그래서

송호철|宋虎哲 님의 말:
남아서 공부할까 생각중이야

4D4954-one_b+one_g 님의 말:
정기적인 운동해라

송호철|宋虎哲 님의 말:
운동하면 공부하라그러고~

송호철|宋虎哲 님의 말:
공부하면 운동하라그러고~

4D4954-one_b+one_g 님의 말:
둘다 해

송호철|宋虎哲 님의 말:
일은 언제하고–;

송호철|宋虎哲 님의 말:
밥먹을 시간도 없어요~

4D4954-one_b+one_g 님의 말:
일도 하고

4D4954-one_b+one_g 님의 말:
밥 안먹고 어찌사니?

송호철|宋虎哲 님의 말:
그니까 밥도 먹고 할려면

송호철|宋虎哲 님의 말:
전부 다 못한다 이거지

송호철|宋虎哲 님의 말:
포기할건 포기하고

송호철|宋虎哲 님의 말:
집중할때 집중하고

송호철|宋虎哲 님의 말:
그래야지 머

4D4954-one_b+one_g 님의 말:
시간을 잘 관리하는 자가 승리하는거야

송호철|宋虎哲 님의 말:
ㅋㅋ

송호철|宋虎哲 님의 말:
시간관리 잘 할께요~

송호철|宋虎哲 님의 말:
근데 너무 관리하면 삶이 퍽퍽해지는거 같아

송호철|宋虎哲 님의 말:
여유롭게 살고 싶어

4D4954-one_b+one_g 님의 말:
논 정리한 것 사진 직어보낼께

송호철|宋虎哲 님의 말:

송호철|宋虎哲 님의 말:
네이버 블로그에 올려~

송호철|宋虎哲 님의 말:
적당한 크기로 변환해서..

4D4954-one_b+one_g 님의 말:
여유롭게 살되 가느 방향이 있으면 된다

송호철|宋虎哲 님의 말:

4D4954-one_b+one_g 님의 말:
알았어

송호철|宋虎哲 님의 말:
아빠도

송호철|宋虎哲 님의 말:
MSN가입해~

4D4954-one_b+one_g 님의 말:
그래 사진 크기를 얼마로 해야 하니?

송호철|宋虎哲 님의 말:
크기는 너무 크면

송호철|宋虎哲 님의 말:
웹에서 잘 안보이니까

4D4954-one_b+one_g 님의 말:
오케이

송호철|宋虎哲 님의 말:
가로가 한 500정도면 될거 같은데?

4D4954-one_b+one_g 님의 말:
알았어

송호철|宋虎哲 님의 말:
아빠도 MSN공부하고 블로그도 공부하세요~

송호철|宋虎哲 님의 말:
네이버에 검색해보면 다 나오니깐

4D4954-one_b+one_g 님의 말:
사진 찍으로 갈련다

송호철|宋虎哲 님의 말:
네~

송호철|宋虎哲 님의 말:
그럼 수고하세요~

4D4954-one_b+one_g 님의 말:
그래 수고

_M#]

골프광? Wolfgang

엄마친구의 독일인 남편 골프광..

그당시엔 ‘아..역시 독일이 잘 살아서 워낙 골프를 많이 치니
별명으로 골프광이라고 부르는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알고보니 이름이 볼프강(Wolfgang)이었던것이다–;

볼프강 아저씨의 가족은 모두 4명.
아저씨,아줌마(엄마와 친구),야스민과 나타샤 두 딸이 있었다.
야스민은 나와 형의 중간나이. 즉 나보다 한살 많았고
나타샤는 한참 어렸는데 당시로 5-6살인가 그랬다.
(당시 본인 11살–; 나타샤도 이젠 벌써 20대인가? ㅠㅠ)

볼프강 아저씨의 취미는 RC비행기 만들고 날리기.
가끔 아저씨와 아저씨 차를 타고(피아트 였던가..) RC전용 비행장
에 가서 비행기 날리는걸 구경하곤 했다.

아저씨 집의 지하실엔 아저씨의 작업실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나무를 깍아 직접 비행기를 만들곤 했다.

야스민과 아저씨가 친구처럼 허물없이 이야기 하고 장난도 치는걸 보면서
참 다정하다고 생각했다. 우리집도 허물없이 지내는 편이지만
야스민과 아저씨만큼은 아니었으니까..

야스민은 나이가 있어 우리랑 어울리는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우리도 마찬가지..더구나 남자여자 편가르던 한국 국민학교에서
바로 독일로 온터라 여자들과는 친하고 싶지 않았다.–;

나탸샤는 어려서 그런지 아주 귀여웠는데 금발이었던걸로 기억
(야스민은 갈색?) 집에 어딘가에 사진이 있을건데 나중에
한번 찾아봐야 겠다.

11살 꼬마의 이별

경양국민학교 4학년 6반 반장!
1990년 내 나이 11살.

‘독일에 가서 좀 있다가 올까..’

가끔 밥먹을 때 아빠가 하던 이야기는 이로서 2년째다.
예전에도 친구들한테 잔뜩 자랑했다가 무산된 적이 있어서
별로 믿고 있지는 않았다.

그냥 언젠간 갈 수 있을까? 라는 생각 뿐.

1990년 10월 3일 동서로 분리되어있던 독일이 극적으로 통일되었다.
그와 함께 아빠의 결심도 굳어진것 같았다.

지역개발을 전공하는 아빠로서는 분단국가였던 우리나라와 독일.
특히 통일 이후의 독일을 연구하는건 대단히 중요한 일이었을 것이다.

우리 가족은 그 길로 4학년 겨울 방학을 1주일도 남겨놓지 않고
독일로 갔다.

서울로 가는 전날. 학교를 나오는 나를 친구들이 교문까지 배웅해
주었다. 물론 남자들만!

당시의 국민학생들은 남자 여자 편가르고 싸운는 일이 많아서
오직 남자애들만 배웅을 나왔던것.

그렇게 교문에서 빠이빠이를 하고 흥분된 마음을 안고 집으로
왔다.

2주정도 전부터는 엄마한테 독일어를 배웠었다.
유일하게 할수있는건 알파벳을 쓰는것과 읽는 법 정도였다.
다행히 독일어는 읽기가 아주 쉬워서 뭔가 되어간다는
느낌이 들 정도 였다.

형과 나의 짐속엔 당시 유행했던 용소야 만화책도 들어있었다.
권법소년 용소야에서 좀 발전한 축구 소년 용소야..

김포로 가는 광주공항에서 대낮에 형이랑 아주 큰 유성을
본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태어나고 3개월정도 있다 비행기는 타봤다지만 전혀 기억에 없고,
떨리는 맘으로 김포행 비행기를 탔으나 비행시간이 짧고 너무
흥분해서 마치 놀이기구를 탄 듯 김포에 도착했다.

그렇게 서울 호텔에서 하루를 보냈다. 엄마아빠가 뭔가 하러갔었나..
나와 형은 호텔 복도에 쪼그리고 앉아 용소야 만화책을 봤다.

다음날 독일로 가는 대한항공 비행기에 올랐다.
국내선과 비교도 안되는 점보기.

창밖으로 펼쳐지는 어마어마한 풍경에 넋을 잃었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을까..
독일 프랑크 프르트 공항에 도착했다.

그때부턴 아주 정신이 없었다.

아빠 후배라는 분과 엄마 친구 남편이 우리를 마중 나왔는데
우리가 갈곳은 프랑크 프르트에서 2시간(기억잘 안남) 정도
차를 타고 가야 하는 도르트문트라는 곳이었다.

축구 팬이라면 이 마크를 기억할것이다.
도르트 문트를 연고로 하는 축구팀~!

암튼 당시 듣기로 “골프광” 이라는 사람과 아빠 후배라는 사람의
BMW를 타고 도르트문트의 아빠 후배 집으로 향하였다.

아우토반의 엄청난 속도와 우리가 타고있는 BMW의 엄청난 속도에
놀라면서..

나의 독일 이야기.

독일과 나는 특별한 인연을 가지고 있다.

엄마 아빠가 결혼한 곳.
내가 태어난 곳이 독일.
그리고 나의 12살을 보낸 곳.

어찌보면 짧은 시간이지만 아직도 내 어린시절의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있는게 독일 생활이다.

나이가 들어 다 까먹기 전에 기억나는대로 적어볼 생각이다.

돌이켜 보면 벌써 15년이나 지났는데 우리나라는 그 당시의
독일 문화 수준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우리 나라도 나름대로 색이 있어 1:1로 비교할 수 는 없겠지만
조금 아쉬운 기분이 드는건 왜일까.

생각나는대로 조금씩이라도 내 기억을 기록해 보자.